삼십여년만에 서울에서 초등학교 동창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갈까 말까 수십 번도 더 망서리다 결국은 가는 쪽을 택했다.
남편은 내 말에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막지는 못했다.
마누라 마음에 바람이 들고있음을 알기 때문이리라.
모두들 어떻게 변했을까
누구누구가 나오게 될까
몇 명이나 나올까
날 알아볼까...
수학여행 날 잡아 둔 초등학생처럼 밤새 뒤척이느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 시절 단짝이었던 친구가 밤중에 전화를 하여
한 시간 가량 통화를 한 터라 이미 마음은 서울로 날아가버리고 만 상태이다 보니
잠이 올 리가 만무였다.
대전에서 올라 오는 친구와 터미널에서 반갑게 상봉을 하고
주차장에 대기 중인 친구들과 약속 장소로 향했다.
모임 시각이 다가오자 웬지 낯설지 않은 중년의 여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들이 동창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지라
서로들 힐끗힐끗 쳐다 볼 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성대고만 있다.
입구가 잘 보이는 곳에 서너명의 신사들이 우리 쪽을 빤히 쳐다 본다.
'이궁~ 보는 눈은 있어가지구...
미인들이 등장하니깐 눈을 못 뗀다, 그치~"
자리를 하나씩 채워 가며 앉기로 하고 이름표를 달기로 했다.
어머나 세상에...
우릴 쳐다보던 그 남자들도 동창이랜다...
몇몇 친구를 제외하곤 도통 모를 얼굴들이고 이름조차도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다.
삼십 년의 세월이 과히 짧은 건 아니었나 보다.
그래도 모두들 살기가 괜찮았는지 푹 퍼진 아줌마들도 없고
남자 동창들도 별로 나이가 들어보이질 않는다.
식사가 나오는 동안 서로의 이름표를 보고서야 말문이 트이길 시작한다.
'그래, 너였구나.
이제 자세히 보니 옛 모습이 생각난다...'
'책상 위에 삼팔선 그어 놓고 넘어 오면 찢어버리기로 했는데
넌 진짜로 내 가방 칼로 귀퉁이 잘랐었잖아, 그치?'
'자르진 않았다 뭐...너네집 쫓아다녔지...'
분위기가 무르익자 서로의 옛 모습들을 들춰내기 바쁘다.
사십여 명이 참석하였으니 얼마나 시끌벅적하겠는가.
지방에서 올라왔단 이유로 회비도 돌려주고 교통비까지 준다하니
이런 호사가 또 어디 있으랴.
남편은 전화 한 통화 없는 마눌이 염려되는지 아들넘을 시켜 가끔 전화를 한다.
잠은 어디서 잘 것인지, 감기 안 걸리도록 조심하라는 둥
잊을 만 하면 전화를 해댄다.
그도 그럴 것이 홀로 여행을 떠나보내긴 처음이니 신경이 쓰이긴 할 것이다.
이차, 삼차,사차까지 이어진다는데
도저히 졸려서 못 따라 다닐 것 같아 새벽녘에 친구네 별장으로 이동했다.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아름다운 집.
호수를 끼고 기역자로 지은 하얀 이층집은 그야말로 '꿈의 궁전'같다.
호수 저 편의 숲 속 단풍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손님을 많이 치뤄보았는지 친구는 음식은 물론
하다못해 치솔, 속옷까지 모조리 준비해두고 있다.
남편과 이 다음에 이쁜 별장을 짓자고 했었는데
내가 그려 오던 '전망 좋은 집'이 바로 이런 집이었는데
풍요로워 보이는 친구를 보니 대리만족에 마음마저 뿌듯해진다.
밤새 수다를 떨다 어느 틈에 잠이 들었었나보다.
아침을 준비하는 친구를 보며 새삼 감탄 또 감탄...
전혀 일을 못 하게 생긴 귀부인같은 친구가
주방에서 마치 요술 냄비처럼 뚝딱뚝딱 요리를 해 낸다.
병어와 갈치를 굽고 토화젓을 내 오고 근사한 아침상을 순식간에 마련해 낸다.
주변 경관에 온 마음을 빼앗겨 집에 가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점심은 근사한 데 가서 먹자며 친구들이 앞장을 선다.
서울 근교에도 이렇게 멋진 곳들이 있었나 감탄하며
멋 진 곳에서 마치 귀빈처럼 대우를 받으며 우아한 식사를 했다.
친구가 잘 사는 이유를 이젠 알 것 같다.
지난 번 동창 모임 때에도 지방에서 온 친구들은 끝까지 책임을 졌다더니
기쁜 마음으로 일박이일을 함께 해 준 친구에게
누군들 감사의 기도를 아끼겠는가...
실컨 구경하고 먹고 해가 질 무렵에야 부랴부랴 터미널로 향했다.
'저렇게 멋진 친구가 정말 우리 동창이야?'
남자 동창들이 날 보고 한마디씩 하더란다.
하기야 다음에도 꼭 오라며 술 못 마시는 날 위해
한밤중에 나가 초밥을 사 온 남자도 있었으니 이런 호사가 어디 있겠는가.
멀리서 왔다고 극진한 대우를 받으니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흐뭇할 뿐이다.
한동안 가슴 한 켠이 텅 비어버려 가을 바람이 숭숭 들어오던 구멍이
어느 정도 막아진 것만 같다.
나이를 먹을 수록 친구들을 더 찾게 된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남자 동창들은 좀 더 자주 모이자고 건의를 해 왔댄다.
모임이 너무나 좋았다며...
이젠 일박 이일간의 화려한 외출에서 돌아 와
예전처럼 또 그 날이 그 날 같은 일상을 살아가겠지...
이 가을이 제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