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런 바보
주인 없는 방안에 바보가 둘 항상 웃고 있다. 방문을 열면 금새 달려와 안길 듯한 토끼
저금통이고, 또 하나는 아들 사진이다.
새마을 금고가 동네에 처음으로 들어와 문을 여는 날, 아들 손을 잡고 그곳에 가서 토끼
저금통을 하나 얻어 왔었다. 아들은 그때부터 이십 여 년 동안 책상 한켠에 두고 동전만 생
기면 토끼저금통을 채워주고 있다. 십 원 짜리든, 백원 짜리든 주는 대로 받아먹는 토끼에게
동전을 떨어뜨리며 행복해 하는 눈빛을 보았었다.
때때로 그런 아들을 위해 남편은 지폐를 동전으로 바꾸어 바지 주머니 안에 넣고 아들
방에 들어가 드러눕기까지 하였다. 이리딩굴 저리딩굴 몇 번을 방바닥에서 딩굴면 우루루
떨어지는 동전을 그대로 깔고 아들을 껴안고 장난치다가 방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아들보고
주우라고 한다. 행복해 하는 두 부자사이에 나도 끼어서 동전을 줍다보면 남편은 내 등을
툭툭 치며 나가라고 눈짓한다. 나는 콩나물 살 돈 두부살 동전 몇 개 더 주머니에 챙겨 밖
으로 나간다.
아들은 방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주어 고스란히 남편에게 건네주면 남편은 주운 돈은 네
돈이니 네 마음대로 쓰라고 한다. 기뻐서 어쩔 줄 몰라 연발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고 인
사하는 아들 곁을 슬며시 방문을 열고 나가 버린다.
남편은 나에게 인정도 사랑도 눈곱만치도 없이 야박스럽다고 말한다. 어린아이가 그 돈
으로 군것질하지 않고, 오락실 가지 않고, 용돈 아껴서 저금통 안에 넣는 모습이 얼마나 신
통하냐는 것이다. 동전 한푼 저금통에 넣어주지 못할망정 일부러 방바닥에 떨어뜨려 놓는
동전을 반찬 핑계 삼아 챙겨야 하는 여자가 사랑할 줄을 아는 엄마냐고 나무란다. 인정도
사랑도 없는 야박스런 엄마가 된 나는 아들 책상 위에서 나를 보고 미소를 보내오는 토끼
저금통 안에 동전을 넣었다.
라파테르 철학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였다. 남편이 아들에게 보내준 사랑에 대해 내가 질투라도 한 것일까! 아
마도 빠듯한 생활비를 주는 남편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잠재해있던 행
동으로 표출했는지도 모른다.
사랑에는 불만족스런 결핍에서 오는 에로스 적인 사랑이 있고, 조건 없이 베풀고 끊임없
이 내어주는 아가페 적인 사랑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아들의 아름다운 아가페 적인
사랑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암 수술 후 다시 재발이 되어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떠나는 엄마 손에 쥐어준 노란 각 봉투 속에는 '엄마가 있기에 행복한 아들 치료비에 보태
쓰세요' 라는 쪽지와 함께 팔십 만원이 들어있었다.
군것질을 아끼며 모아진 동전이 토끼 저금통 안에 채워지면 새마을 금고 통장 안에서 다
시 부풀어져 이다음에 아들이 꼭 필요한 곳에 쓰겠노라던 돈이었다. 돈보다 엄마의 생명을
더 소중하게 사랑했던 따뜻한 마음.
인간은 채워지기 위한 빈 그릇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 동안 토끼 저금통 안에 동전을
채우며 아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어떠한 것을 버렸을까.
시를 좋아하던 아들은 새로운 시집이 나왔으면 한 권 사들고 와서 시 한편을 읽어주며
엄마도 우리 사는 이야기를 써 보라고 격려해 주더니만, 정작 운동도 하고싶고 그림도 그리
고 싶다던 마음은 어디에 접어 두었는지.
돈만 있으면 행복도 지위와 명예도 채워 질 수 있다는 물질적인 욕망이, 진정한 사랑으
로부터 오는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어설픈 군복차림의 부동자세로 경례를 하고 있는 아들 사진 옆에서 나란히 마주보며 웃
고 있는 토끼 저금통. 사랑으로 일치하는 나눔의 사랑을 보여준 두 바보.
바라볼수록 보고픈 사람이 바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