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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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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술 잔


BY 개망초꽃 2003-11-08

나에겐 빈 술 잔을 채워줄 친구가 하나 있다.

간직거라곤 열평정도되는 임대아파트 한 채와
중학교라는 곳에 다니는 사춘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딸아이 하나와
비리하게 마른 체구와 까무잡잡한 피부와 언제나 머슴마형 카트머리와
오리 궁둥이에 핸드폰을 찔러 넣고 다니는 털털한 친구가 한 명 있다.

호수공원에 자전거 타러 간다며 "나올테면 나와봐라" 전화하는 갑자기 친구.
언젠가는 혼자서 바위산을 오르다 죽을뻔 했다며 바위산에 매달려 내 이름을 불러봤다는
엉뚱하고 골때리는 여자.
죽은 뻔한데 내 이름은 왜 부르고 그러냐말이다.
난 그 시간에 손님들에게 콩나물 팔고 사과 팔 시간인데 말이다.

우린 컴에서 쪽지로 새벽까지 우정을 속살거렸는데 요즘은 컴에선 볼 수가 없다.
딸아이가 컴 중독증세가 있어 인터넷을 끊었단다.
그래서 내가 요즘 조금 외롭다.
컴에 들어와서 쪽지를 날려 줄 친구가 없어서 허허전전하다.

우린 참 많이 닮은 세모난 삼각자다.
둥근 지구에서 둥글게 살지 못하고 사랑이란 동그라미도 만나지 못한 낡아져 이가 빠진 세모난 삶.
그래도 우린 돈걱정도 안하고 아이들 공부 안달도 안하고
남자를 엄청 사귀고 싶어하면서도
이 남자는 고리타분해서 싫고, 저 남자는 나이 들어보여서 싫고,
또 이 남자는 믿음이 안가서 싫고, 또 저 남자는 잘나서 감당하기 어렵다나......
솔직히 말해서 사랑한다고 죽어라고 쫒아다니는 남자가 없어서 그런건데 말이다.

우린 한달에 한두번 정도 만난다.
그것도 술 한잔하자로 시작했지만 결국은 안주를 먹기 위해 술을 먹는 것 같다고 나는 쉽게 생각한다.
맨처음엔 골뱅이 무침이 먹고 싶어 생맥주로 시작을 했다.
그 다음번엔 통닭으로 몸보신하려고 통닭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청하로 술을 바꿨고,
얼마전엔 살쪄야한다며 곱창을 먹으면서 술 이름이 맘에 들어 산사촌으로 건배를 했다.
앞으로 얼마동안은 산사촌이 우리 둘 사이의 빈술잔을 채워줄 것 같은 깊은 예감이 든다.

최근에 만난 건
이번주 화요일이었다.
우린 술 한잔 하자며 또 밤 열시에 만났다.
내가 아홉시에 매장문을 닫으니까 늦은밤에 항상 만나게 된다.
우린 또 산사촌을 한 잔 따라 놓고 대화의 물줄기를 흘려 보냈다.
"내장사 갈 일이 있었는데 안갔어."
"왜? 요즘 내장사 단풍 죽여주는데."
"난 뻘건 단풍은 싫어.난 노란 단풍이 좋아."
"에구...답답한 것아 뻘건 단풍 싫다고 내장산엘 안가? 이런 멍청한 것아~~"
이런 엉뚱하고 골때리는 친구가 다 있다.
내장산 빨간색 단풍나무가 싫어서 그 좋은 구경을 안갔다는 것이다.
"난 뻘건색 단풍은 싫다니깐. 노오란 단풍이 좋아. 그래서 은행나무가 좋아. 으헤헤헤"
"은행나뭇잎을 많이 보려면 덕수궁가면 좋은데......"
"맞다!"
"버스에서 내려 매장가는 길가에 우체국이 있는데 그 앞에 은행나무가 한창 노랗게 물이 들었드라."
"멋있겠다."
한시쯤 우린 일어섰다.
술 두어잔 마시고 얼굴이 화끈해져 술 집을 나서면
바깥바람은 가진 것 별로 없는 우릴 다정하게 감싸 안아준다.
그럼 친구는 자전거를 끌고 내가 타야할 버스 정류장까지 타닥타닥 걸어가 준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못다한 얘기를 하다가
정류장을 벗어나려는 버스를 손을 들어 쫒아가며 소리까지 질러가며 세웠다.
달려가 숨차게 탔더니 운전기사 아저씨가 야단을 쳤다.
버스 탈 사람이 그러고 앉아 있으면 어떻하냐고 이게 막차라서 세워줬단다.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뒤돌아 친구를 보니 친구는 어정쩡하게 자전거를 잡고서
내가 탄 버스 뒤꽁무니를 쳐다보고 있다.
항상 헤어질 땐 그 모습인데 항상 쓸쓸해 보이고 항상 불쌍해 보인다.

나의 빈 술잔과 빈 나의 가슴앓이를 채워 주는 친구는 컴 동갑내기 동호회에서 만났다.
동갑이라서 같은 일산에 살아서 나와 비슷한 혼자임을 가지고 있어서 우린 쉽게 친구가 되었다.
무능력한 남편,사춘기에 접어든 딸,백화점에서 일을 해야 먹고사는 게 해결되는 고된 하루.

세상물정을 모르는 순수함과 가진것 없어도 욕심이 없는 순박함과
한 남편만 바라보고 살아 온 순정파를 겸비한 요즘 여자가 아닌 천연기념물 같은 여자다.
내 생일날 아무도 챙겨주는 이 없었는데
하늘하늘한 레이스 달린 팬티 사 들고 와서는 술도 사줬던 야한 여자다.
그 팬티 입고 보여줄 남정네도 없는 나에게......흐흐~~
화장도 잘 안하고 파마도 안하고 돈도 없으면서......
의료보험료도 밀렸다면서......

어제 매장을 향해 걸어가는데 비가 추적추적 서글프게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 우산도 안받고 걷는데
우체국앞 길가에 비 맞은 은행나무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은행나무 가지마다 잎이 샛노랗고,
나무 밑 바닥엔 은행잎이 샛노랗게 붙어 있었다.
은행잎에 딱풀을 칠해 종이벽에 다닥다닥 붙혀 놓은 것 같이 선명했다.
그래서 뻘건 단풍은 싫어서 내장사에 안갔다는 친구가 보고싶었다.
노랗에 물드는 은행잎이 좋다는 친구가 정말 보고 싶었다.
"우체국앞에 너가 좋아하는 노란은행잎이 한가득이야."
이렇게 문자라도 남겨야지 했는데
호박고구마 세일치는 날이라 하루종일 발바닥이 얼얼하도록 바빠서 잊어버리고 말았다.

너의 빈술잔을 따라줄 넉넉한 사람 만나라.
너의 빈 터를 꽃으로 가득 채워 줄 착한 사람을 만나거라.
너와 같이 노란 은행잎을 감상할 아름다운 사람을 어여 만나길 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