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비 오는 날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문득 유리창을 보았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몹시 초췌해 보였다.
요즘 남편이 병원에 입원하고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을 하는 터라 식사도 제때 못하고 잠을 잘 못 자는 흔적이 역력하였다.
마음속으로 버스 안의 내가 유리창안의 나에게 살며시 말했다.
“ 야윈 모습이 더 예쁘구나. 더 예뻐지려면 더 견디는 힘을 길러야겠지?”
논리에 안 맞는 자문자답을 하고 있는데 유리창 옆의 흰 얼굴에 감청색 정장 한 벌이 실루엣으로 떠올라
컴퓨터 사진에 합성하듯이 버스 안의 연두색 스웨터 위에 합쳐지는 것 아닌가?
잘 어울린다고 느끼면서 순간적으로 뚫어져라 유리창의 여인을 다시 응시해보았다.
연두색 옷 어디에도 감청색 물감이 묻은 흔적은 없었다.
마음안 나의 욕망이 빚어낸 흔적임을 오늘 절실하게 알았다.
오늘 아침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문득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분홍색 한 복이 생각났다.
상상 속의 그 한복은 약간 도톰한 천이면서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이다
“아! 아름다워라..”
잠시 넋을 잃고 중얼거리다 역시 상상 속의 그림자의 너울을 또 덮어쓰고 즐거워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몇 분의 명상 끝에 내 마음속 깊숙이 은밀히 숨겨진 욕망을 보았다.
단정하게 입으면 된다는 식으로 늘 아무렇게나 색상엔 신경 쓰지 않고 옷을 입고 다녔는데 연속하여 옷을 상상한 것은 의외의 일이다.
청색 정장 옷이 상징하는 것은 나의 일과 관련된 것이다.
다니는 회사의 청색 이미지에 걸맞은 것으로 아마 제대로 일을 능숙하게 하여 회사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이 잠재해 있다가 비 오는 날의 습기찬 공기를 뚫고 불쑥 솟아 오른 것 아닐까?
또한 분홍색 한복 한복의 이미지는 여성스럽고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으로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간절한 그리움이 아침의 맑은 하늘 위에 상상의 이미지가 영상화된 것 아닐까?
마음의 신비함이란 때로 생각지도 않은 일을 저지른다.
한겨울에 산딸기가 먹고 싶다고 생각하기도하며 한여름에 눈싸움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하기도 한다.
이 가을 비 오듯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잎에서 장사익의 “찔레꽃 ”노래를 들었을 때의 애절함이
찌르르 가슴 언저리를 울리기도 하는가하면 지나가는 자동차의 경적소리에 모르는 기사 분에게 마치 철천지원수나 되는 양 분노를 느끼게도 한다.
옷 이야기를 하다가 옆길로 새는 건 또 무슨 마음의 장난일까?
그래, 다시 옷 이야기를 하자.
돌아보건대 나 자신의 모순이 바로 청색과 분홍색 사이에 있다
근면 성실하게 일상생활에 철저히 하려는 이성적인 면과 아름답고 여유로운 문화생활을 꿈꾸는 감성적인 면 사이에서 표류하는 한 척의 조각배일는지도 모른다.
청색이 상징하는 절제와 정직과 진실과 노동과 노력에 비해 분홍색이 상징하는 욕망과 거짓과 꿈과 방일의 틈바구니에서 왔다 갔다 방황하는 그런 조각배일는지도 모른다.
청색의 삶은 편안하다.
절제하고 노력하고 노력한 만큼 얻으며 단순하게 살면 되는 청빈하게 부유할 수 있는 삶이다.
반면 분홍색의 삶은 아프고 괴롭다.
절제보다 얻을 수 없는 것을 가지려는 욕망의 화살을 꽂고 정직대신 끊임없이 거짓을 말해야한다.
진실에 밀착된 삶이 아니라 허공에 발 디딜 곳없는 낭떠러지에서 목숨을 내건 게으름에 흐느적거려야한다. 목숨을 내건 게으름에 흐느적거린다는 이런 비유자체가 바로 나의 분홍색 영혼이 내뱉는 거짓말이다. 보라!
또 하나의 유쾌한 거짓말이 생성되었다. 그 누구도 영혼의색갈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나의 영혼이 분홍색이라고 말했지만 누가 분홍색이 아니라고 반박하러 올 것인가?
한 간 크고 뻔뻔스런 중년여인이 이상과 현실사이의 틈바구니에서 힘들다고 말하는 대신 청색 정장과 분홍색 한복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바꾸어 말한들 또 누가 비난할 것인가?
내가 살고 싶은 삶은 분홍색 삶이다.
해가 중천에 오르도록 방바닥에 배 깔고 뒹굴고 싶다.
내 대신 청소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청소해주는 사람은 내 마음을 100퍼센트 알아차리고 내가 조용히 있고 싶을 때 정적을 깨뜨려선 안 된다. 내가 방안이 어지럽다고 생각하는 순간 소리 없이 나타나서 말갛게 정리한 다음 벽속으로 사라져야한다. 내가 꿀물이 먹고 싶다 생각하면 “꿀물대령이요” 하며 시종이 나타나 공손하게 가져다주고
커피하면 커피 꽃병하면 꽃, 전주비빔밥하면 전주비빔밥이 척척 대령되어야 한다.
쓸쓸해하면 쓸쓸함을 달래주는 음악이 흐르고 슬퍼하면 슬픔을 달래줄 친구가 옆에 있어야한다.
이 모든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쓰고 있는 건지 쓰게 되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지켜보면서
분홍색 삶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청색의 나이를 어쩔 수 없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도 내가 택한 평생의 반려자는 여전히 내 남편이며 사랑해야한다는 의무보다 같이 늘어가는 동지에의 연민을 느낀다.
동지에의 연민보다는 강한 사랑을 느껴야하는데 분홍색 영혼이 거짓말속에서라도 존재하여서인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열정은 없다.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서 사람의 도리를 벗어나지 않고 삶의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는 것과 청색의 정장과 분홍색 열정 사이에 흔들리면서 그 흔들림조차 즐기면서 사는 낙천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낙천적인 면으로 하여 아무리 비극적인 상황이 오더라도 고통조차 ‘와! 내 삶의 숙제를 이제야 풀겠네’하리라는 것등이다.
어떤 색도 하나만 택해서도 안되고 또 둘 다 버려선 안 된다는 것등이다.
그래서 오늘도 분홍색 안에서 흔들리면서 슬그머니 청색 톤의 이야기가 되고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