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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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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의 수다


BY 이쁜꽃향 2003-10-27

일요일 남편 동창회에서 부부동반 산행을 하기로 했다.

첫 행사였던 작년엔 무작정 빈 손으로 따라 나섰던 터라

산행 도중에 비마저 간간이 내리고 점심 시간이 지연되어 기다리는 동안

너무나 춥고 배가 고팠단 기억만이 남아 있다.

하여 이번에는 아침도 단단히 먹고 쵸콜릿이며 귤 등 간식까지 챙겼다.

마침 날씨는 화창하다는 예보여서 추위 걱정은 하지않아도 되었다.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에 흩어져 있는 동창들이 

고창 선운사로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온가족이 총동원 된 동창도 몇 보이고

남자 혼자서만 참석한 동창도 더러 보인다.

시간에 선운사 주차장이 남편 동창 가족들로 꽉 메워졌다.

날씨가 좋으니 다른 관광객들까지 몰려 들어 그야말로 선운사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체사진 몇 장 찍고 각 지역별로 사진촬영을 하느라 부산한데 사진촬영은 뒷전이고

모두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인지라 서로들 아는 체 하느라 아이들처럼 시끌벅적하다.

예전엔 앞다투어 형님 행세를 하고자 '제수씨'라 부르기 바쁘더니

이젠 거꾸로 반백의 나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지

서로 먼저 '형님'이라 부르려고 선수를 친다.

 

그 인파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 나온다.

"널 보고 싶어 오늘 따라 온거야."

반갑게 손을 잡는 그녀를 깜짝 놀라 잠시 뚫어져라 살펴보니 세상에나...여고 동창이다.

십여 년만에 처음 만나는 셈인가.

남편 사업상 광주로 옮겨 간 후 친구들을 통해 풍문으로만 소식을 간간이 들었을 뿐

얼굴을 대한 건 정말 너무 오랜만인 친구.

그간 고생을 참 많이 했다는데

최근에 사업이 호전되어 잘 살고 있단 얘길 얼마 전에 들은 적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얼싸 안고 안부를 묻는 것도 잠시

산행이 시작되니 인파에 밀려 그저 물 흐르듯 단체 뒤를 따르기 급급했다.

 

서로들 사는 게 바빠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살다가

이젠 중년이 되어 아이들도 고등학생, 대학생으로 자라고

어느 정도 자리도 잡히고 안정이 되니 남자들도 옛친구가 그리워 지는가 보다.

예상외로 작년보다 훨씬 많은 동창들이 참석하여 음식이 부족할 지경이란다.

작년엔 음식이 남아 돌아 처치곤란이었었는데...

칠십여명의 동창이 참석했다하니 가족들까지 합하면 그 숫자가 백여명이 훨씬 넘으리라.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는 이, 우리 동창 맞느냐고 갸웃하는 이,

왜 이렇게 폭삭 삭았느냐, 넌 하나도 안 변했다는 이...

쉴 새 없이 떠드는 남자들을 보니 여자들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도 각양각색인지라 대통령과 국무총리만 빼고는  다 있는 것같다.

지방 명문고 출신들 아니랄까 봐 모교 교가제창은 절대로 빼질 않는다.

 

점심 땐 곳곳에서 마주 앉은 친구들끼리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또한 현재의 모습을 보면서 과거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느라 모두들 분주하다.

 

"쟤가 교수라고?

아니, 그럼 쟤 밑에서 학생들이 뭘 배운단 거야?

학교 다닐 때 아주 꼴통이었잖아."

 

"미국에 산다는 김 아무개 있잖아, 서울대 수석했었던...

그 친구가 생물 시간에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했었거든.

그 때 파리' 에 대해서 선생님이 설명하신 후 '질문 있는사람~'하셨는데

공부 잘 하는 그 녀석이 '질문있는데요~'하며 손을 든거야.

'선생님, 파리는 앞다리와 뒷다리를 비비는데,

그럼 가운데 다리는 언제 비벼요? '했다가 그 날 작살 나게 얻어맞았단 거 아니냐.

공부도 잘 하는 녀석이 그런 질문을 했으니..."

 

"난 아무 생각없이 사는 범생이였는데 말야,

아 그 수재인 친구가 쉬는 시간에 내게 넌 인생의 목표가 뭐냐고 심각하게 묻는거야.

나는 대답할 말도 찾질 못해 낑낑대고 말았는데...

오늘날 그냥 요모양 요꼴로 산다야~"

 

"최 아무개는 어떻고?

지금 검찰청에 근무한다던데...

걔 학교 다닐 적에 폭력 전과 있었잖냐.

그 때 정학 시킨다 해서 나랑 김 아무개랑 교장 선생님께 무릎 꿇고 빌어서

걔를 좀 봐달라고 하기로 결심하고 찾아뵙겠다고 전화를 드렸거든.

그 날 교장 선생님이 퇴근도 안 하시고 숙직 하셨잖냐.

선생님 댁에다는 학생들 찾아오면 문 열어주지 말라하시구선...

다음 날, 학생주임 선생님께 불려 가서 우린 반 죽었지...

'야~!!너네들이 그렇게 주먹이 세냐?  어디 그럼 나랑 한 판 붙어볼래?

너네들 때문에 우리 학교 개교 이래 처음으로 교장선생님께서 숙직하셨다, 이놈들아!!!'

우린 그냥 무릎 꿇고 빌려고 했던 건데

선생님은 우리가 쳐들어 가는 걸로 오해하셨던 게지..."

 

옛날엔 그랬는데 지금은 너무 변했다는 둥,

예나 지금이나 똑 같다는 둥

이제는 자신의 아이들이 그 시절의 자신들과 같은 나이가 되었으련만

반백의 중년은 여전히 고교생으로 머물러있고 싶어서인지

여기저기서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일어날 줄을 모른다.

여자들만 엉덩이가 무거운 줄 알았는데 남자들은 정말 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불낙에 홍어, 삶은 돼지고기와 푸짐한 음식들로 포만감을 잔뜩 느끼는 반면

이 행사를 준비하느라 애를 썼을 그 누군가에게 미안함과 감사함을 함께 느끼며

여자들은 관객이 되어 남편들의 잔치를 흥미롭게 지켜보기만 할 뿐.

 

시간이 흘러도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 반백의 남편들을 재촉하는 부인들이 하나 둘 늘어 나니 나도 덩달아 먼 길을 가야할 사람처럼 이제 그만 술자리에서 털고 일어나기를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임을 몇 번이고 알려주어야만 했다.

 

산도 좋고 햇살도 좋은 아름다운 숲 속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남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즐거웠을까...

발목이 뻐근하고 온 몸이 나른해지는데에도 피곤하지않음은

그들의 즐거움이 내게로도 전해져왔음이리라.

 

이 좋은 가을이 다 가기 전에

함께 늙어 가는 반쪽 내 남편과 자주자주 산에 오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