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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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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막힌 절규를 알기나 할까요?


BY 잔다르크 2003-10-12

늘같은 햇살엔
발 가득
새빨간 고추를 널어 말리면
금새 달그락달그락
씨앗 구르는 소리가
날 것 같습니다.

황토빛 마당 가득
흙투성이 콩단을 풀어놓고
쉼없이 도리께질을 하시던
할아버지의 하얀 무명옷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몸에 착 달라붙곤 했었지요.

땅속에 박힌 콩알 하나하나
일일이 거두어 들인다고
마당을 이잡듯이
샅샅이 훑고 다녔지만
그 가을엔 큰 욕심이 없었지요
아마도...

텃밭 끄터머리
발가벗은 채 서서
주홍빛으로 눈과 입을 즐겁게 해주던 감나무
과일이라야
떫은 감이 마카 다 였으니
전주고 고르는 수고 또한 없었지요.

느린 걸음으로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쬐며 난전을 기웃거리다
한 번 걸쳐 보란다고 덥석 입어본 털쉐타가
살갑게 느껴지는 걸 보니
벌써 여름의 기억이
아득해집니다.

엉거주춤
서점 한 쪽 귀퉁이를 차지하곤
김주영님의 젖은 신발이란 산문집을
이틀째 뒤적였습니다.
무조건적인 희생과 양보를 강요당했던
누이와 누나란 이름으로 살아가야 했던 이 땅의 딸들.

딸 다섯에 외동이었던 친정 아버지
딸 일곱에 외동인 내 옆지기
그리 멀지도
남의 일도 아닌
아리한 기억의  파편들이
가슴을 후벼팠습니다.

딸네들 입으로 고기 한지름 들어갈까 저어 되어
아들만 뒷마당으로 데리고 가
솥두껑 뒤집어 놓고 삭정이 불 지펴
질릴 때까지 구워 먹이더라는
돼지고기 냄새 고문 사건은
우리 시누이들 넋두리고.

남의 집으로 갈 지지바가 (계집)
공부는 무슨 공부냐고 하도 성화를 대
결국 스스로
소학교 자퇴서를
내고 말았다는 전설은
내 고모님들의 응어리진 한이고.

금방 낳은 따끈따끈한 달걀
손주 입에 넣어 보겠다고
먹기 싫다며 도망가는 뒤꽁무닐
따라 따라 가며
마시거라 마시거라 성화를 대는 바람에
애꿎은 침만 삼키며 서러워 했다는 친구까지...

타박타박 돌아오는 뒷골목엔
늘어진 가지에서 떨어진 홍시가
아스팔트 위로 패대기 쳐져
뭇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뭉그러져
터진 배를 내보이고 있었습니다.
필시 벌레가 먹어 남 먼저 그리 되었겠지요?

이 땅의 누이 누나들이
그렇게 별스럽게
먹이고 입히고 거두었던 오빠 동생들이
그 기막힌 절규를
알아주든지 말든지
가을은 자꾸 깊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