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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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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


BY 개망초꽃 2003-10-11

한 낮 태양이 숱도 없는 머리 정수리에 내리 쪼일 때 난 출근을 한다.
아니 장사를 하러 또는 돈벌러,
"아고~~ 오늘은 더 늦어버렸네" 하면서 다리에 쥐가나게 걸어 간다.
아니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뛰어가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최대한 주책맞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10층에서 승강기를 타고 승강기문에 바짝 서 있다가
승강기 문이 열리자 마자 툭 튀어 나가서는
백일홍이 피어 있는 계단을 타닥타닥 내려와
요즘 막 피어나는 처녀 얼굴같은 노란 국화를 지나고
초가을부터 피기 시작한
이젠 피부에 탄력이 없고 윤기가 없는 중년티가 물씬나는 자주색 국화를 보며
"쯔쯧, 내 얼굴과 비슷하군,세월앞에선 꽃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라니......"
바쁘다면서 볼 건 다보는 나.

심심해서 하늘만 보고 있는 놀이터를 스쳐
플라타너스 가로수밑을 뛰다시피 지나가서는
아들내미가 다니는 초등학교 뒷문을 보며 점심 먹을 시간인가 생각하면서,
이제 온만큼의 반만가면 버스 정류장이다 생각하면서,
머리속은 이생각 저생각 잡생각 오만생각을 하면서,
발은 재빠르게 오른발 딛고 왼발 들어올리고,
다시 오른발 딛고 왼발 들어올리고, 똑같은 동작을 실수를 하지 않으면서,
실수를 했다가는 넘어지는 거지만서두......

신호등 아래 서 있으면 햇볕이 더 강렬하다.
바로 초록불이 켜지만 좋겠지만 그것이 내 맘대로 되는게 아니라서
하긴, 사람사는 일이 내 맘대로 되면 지랄하고 싸울일도 없고, 죽이고 싶도록 밉지도 않고,
때려주고 싶을만큼 속상하지도 않겠지만서두......
초록불이 켜지면 더 빠른 발놀림으로 횡단보도를 건넌다.
오늘도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 알맞게 초록불이 켜졌는데
반항아 오토바이가 신호도 안지키고 지나가려는 폼으로 달려오길래 멈춰서야만 했다.
그랬더니 반항아 오토바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부앙~~하고 엔진에 바람을 맘껏 넣고는 부아앙~~하고 달려갔다.

횡단보도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십미터쯤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청녹색 썬그라스를 낀 듯한 버스정류장의 차양은 그 밑에 길게 누워 있는 나무의자 하나에게
산뜻한 녹색 그늘을 만들고 있다.
나무의자 위엔 어느날은 신문이 허벌럭하게 펼쳐져 있고
어느날은 광고지가 벌러덩 자빠져 있고
대부분은 오늘같이 어지러지지 않고 깨끗이 청소되어 있는 날이 많다.
신문이 너져분하고 담배꽁초가 떼지도 몰려다니고 캔이니 과자 봉지들이 돌아다니다가도
다음날은 깨끗이 치워져 있어서 누군가가 치우고 있구나 했다.
이런 난잡한 쓰레기를 치우는 분은 할아버지 두 분이셨다.
긴 집개로 담배꽁초를 하나하나 집어서 쓰레기 비닐 봉지에 담는 동작이 능숙해서 그런지
쉬워보이고 소일거리로 정거장 마다 치우고 다니시나 하는 한가한 생각을 하게 했다.
두 분 할어버지가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팔자 편한 소리하고 있다고 잔소리를 하실지도 모르지만서두......

난 나무의자에 앉아서 버스 오는 방향으로 몸과 고개를 살짝만 돌린다.
잠시지만 기다리는 동안 가을로 접어드는 나무를 보고
가방에서 읽던 책을 꺼내 읽기도 한다.

중앙선을 경계로 느티나무가 한 줄로 나란히 심어져 있는데
느티나무는 차 꽁무니에서 나오는 매연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서 그런지
봄이면 새순이 귀엽게 나오고
여름이면 창창하게 성숙한 잎으로 팔락거리다가
가을이면 어김없이 자신들의 본래색으로 돌아가고 있다.
나뭇잎의 초록은 위장색이라고 어느날 라디오에서 들었다.
저마다 색이 다르게 단풍이 드는 건 그 자신들만의 고유의 색이 드러나는 거라나......
확실한 건 잊어버렸으니까 자세한 건 묻지마세요. 헤~~
느티나뭇잎은 붉은 갈색으로 물이든다.
똑같은 크기 똑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이 나무는 물이 진하게 들어 있고,
조 나무는 이제 막 가을이 오고 있고, 조기 저 나무는 아직도 초록이 생뚱맞다.

오늘은 아무도 없이 나 혼자서 버스를 기다렸다.
대부분 이 시간대는 점심시간이라서 그런지 혼자일때가 많다.
그러나 토요일이나 오전 수업만 있는날은 전혀 다르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 가까운 곳에 고등학교가 있어서 토요일날은 네다섯명씩
나무 의자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다.
"좃나~~씨벌~~짜증나." 감탄사(?)를 섞어가며 대화를 연결해 가는 학생들을 보면
버릇이 없다거나 싸가지가 없다거나 요즘 것들 세대차이 느낀다거나 그러지 않는다.
왜 내가 이런 너그럽고 한편으로 귀엽기도 하고 실없이 웃음이 나오는 것은
다 딸내미 때문이다.

어느날 딸내미가 친구랑 전화 통화를 하는 걸 가만히 들어보니
조신하고 얌전은 커녕 좃나 짜증나 를 쓰면서 말을 하는게 아닌가!
난 가슴이 철렁 배꼽에 붙었다가 덜컥 목으로 올라 갔다가
제가 분명 불량학생이 된거야 저러다가 문제아로 찍혔다가 나를 오라고 연락이 오고 그러면?
난 다음날 담임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상시엔 학교를 간다거나 전화 통화를 하지 않는 나지만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거 가래로 막기전에 손을 쓸 생각으로 어렵게 어렵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이상아 엄마예요."
"아...네...안녕하세요.상아 어머니~~"
"찾아 뵙지도 못하고......죄송합니다."
"아니예요.어머니 장사하신다는 거 상아한테 들었어요."
어? 별걸 다 아시네, 잉?부드러우시네.
"상아 요즘 학교생활이 어떤가 해서요.혹 말썽 피우지 않나요?"
"아니요.일학기보다 성적이 떨어져서 그렇지 친구들하고도 잘 지내고 착하고 명랑해요."
'네에......오호호호호"
"아! 네......오호호호호"
내가 웃으니까 선생님도 따라 웃으셨다.

좃나나 씨벌이나 짜증나는
옛날 내가 학창시절에 쓰던
"에이씨~~너무 신경질난다"와 비슷한 언어였던 것이었다.

백미터 전방에 내가 맨날 타고 다니는 88번 버스가 온다.
왜 그렇지 않은가.수많은 아이들틈에서도 우리 아이를 알아 볼 수 있듯
10층 아파트 위에서도 아래를 내려다 보면 저기 급하게 걸어오시는 분이
내 엄마인지 금방 알 수 있듯이
백미터의 거리를 두고서도 저 버스가 내가 탈 88번인지
내가 원하는 정류장까지 갈 수 없는 버스인지 다 알 수 있다.

가을이 진지하게 스며드는 가로수 바라보기를 그만두고,
보던 책을 가방에 넣고, 카드로 버스 요금을 지불하기 위해서 까만 헝겁 지갑을 끄낸다.
그리고 힘차고 씩씩하게 지갑든 팔을 길게 뻗어서 손목을 아래위로 살살 흔든다.
그럼 팔십팔번 버스가 내 앞에 끼이익~~~서고서는 버스 앞문을 화알짝~~열어준다.
88올림픽하고 88번 버스와 어떤 친분관계가 있는지
서로 어떤 모호한 협찬을 하고 있는지 그런건 모르지만서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