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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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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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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een할머니! 잘 계시져...


BY Maureen 2003-10-11

이주뒤에 있을 이사를 생각해서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구석구석 쌓아둔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다. 새집을 들어간다는 부푼 기대와 더불어 버릴건 버려야 하기에....

하지만 나에겐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너무나도 쌓아둔게 많아서일까...

먹다가 지쳐 남은 음식을 쌓아둔 냉동실칸이며...웬만하면 버리지않고 쌓아둔 옷가지들이며...남편의 총각시절 잡동사니물건들이며...각종 공과금영수증과 서류들...

그리고 지인들로부터 받은 편지뭉치들...

그 뭉치들가운데 빨간 크리스마스봉투위에 필기체로 쓰여져있는 그 이름이 문득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내맘을 그리움으로 사무치게 한다....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네...

세상물정모르는 여대생이 모험을 감행하면서 영국행비행기를 타던때가...

전형적인 영국날씨를 실감하면서 시작된 영국생활의 첫날...그리고 그녀와의 첫만남....

내가 머물기로 되어있던 하숙집주인아가씨가 남아공으로 휴가를 떠나는바람에 난 하숙집옆집에 살고 있는 그녀의 집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제시카의 추리극장에 나오는 주인공할머니의 목소리에...묵직한 안경너머로 보이는 아름답고 신비스런 잿빛눈동자...나이에 걸맞지않은 잘록한 허리에 은빛이 감도는 샌달에...

우리의 할머니의 모습과 확연히 다른 할머니의 모습으로 다가온 그녀...

난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있노라면 그녀의 눈부신 처녀시절의 모습을 역력히 읽어내려갈수 있었다...너무나도 아름다웠을....그녀를 만나기전까지는 할머니라는 대상으로부터 풋풋한 시절의 채취를 도저히 찾아볼수 없었다...

한번씩 포크송에 맞춰서 앙증맞은 아가씨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주름진 후레아치마가 부채꼴을 이루며 신나는 춤을 출때의 그녀의 모습은 어느 아리따운 아가씨의 모습보다 천진난만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있어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어머니의 내면을 가진 존재였다...

 

난 학교가 파하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던져두고 항상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나의 이러한 행동에 대한 하숙집주인아가씨의 섭섭함은 안중에도 없는듯....

친할머니의 얼굴조차 모르는 난 그녀로부터 할머니로부터 느끼는 온정을 생전 첨으로 느꼈었다...

그녀는 틈나는대로 날 그녀의 집안 이곳저곳을 데리고다니면서 구석구석의 해묵은 물건의 역사에 대해 그리고 그녀가 직접 심어놓은 정원의 화초들을 꼼꼼히 설명해주곤 했다....

버스를 타고가는 그녀와의 외출중에도 그녀는 버스안에 있는 내내 이방인인 나에게 하나라도 놓치지 않게 거리에 스쳐지나가는 바깥건물의 이것저것에 관한 설명을 곁들였다...

그녀가 하는 설명은 너무나 쉽고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치없이 불쑥불쑥 들르는 나에게 그녀의 다양한 먹거리는 날 항상 흥분시켜주었다....

투명유리병에 차곡차곡 넣어둔 과자며...치즈가루가 녹아있는 토스트며...오븐에 통째로구운 닭고기요리에 거기에 곁들인 구운 토마토며...우유를 넣은 떨떨름한 맛의 짙은 홍차....노란커리로 물들인 볶은밥...

그녀가 만든 음식은 타국생활에서의 내 식욕부진을 무색케할정도록 왕성하게 했다...

지금도 그녀가 만들어준 음식이 그리울때마다 곧잘 만들어먹곤 한다....

당시 영어회화라곤 기본조차도 안 되어 있던 나에게 그녀는 나의 훌륭한 영어선생님이었다...그녀로인해 영어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감을 결정적으로 떨쳐버릴수 있었던것같다...

이것만으로도 난 그녀에게 큰 빚을 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나에게있어 그녀 역시 차가운 이방인일수 밖에 없다는 내 석부른 생각이 어느날 그녀가 흘리는 눈물로인해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자식을 걱정하는 우리네 엄마와 다를바없이 너무도 닮아있었다...

결혼한 딸이 남편으로부터 구타를 당한 일을 떠올리며 하염없이 울던 그녀....당시 그녀를 위로하기에 내 영어가 너무 짧았다면 핑계였을까....그냥 그녀의 눈물만 닦아주었던것 같다...

 

자식의 인생을 내뜻대로 움직일수 없고 단지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크나큰 위안이 되어줄수 있다는 그녀의 말은 부모된 지금의 나에게 자식을 바라보는 관점의 토대를 이루게 했다...

당시 20대후반정도의 나이였던 그녀의 아들 게리가 자기엄마인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여자랑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접할때도 그녀는 아들의 그러한 선택을 탓하지 않았다고 한다....그런 선택을 할수밖에 없는 아들을 믿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아들 게리와 할머니와 다름없는 아들의 아내(그녀에게 있어선 며느리)가 함께 찍은 사진한장을 나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아들이 어떤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든간에 아들이 행복해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하셨다...

우리네 어머니라면 그런결혼을 절대 방관하지않고 도시락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거나 호적을 파버리는일까지 날건데...

그녀의 이러한 점이 나로하여금 그녀가 나의 이상적인 어머니상으로 비춰지게 했다...

당신의 뜻대로 자식이 움직여주지 않을때 자신이 내뱉을 수 있는 가장 거친 언어와 모질음까지 보여주던 내 엄마의 모습과 너무나도 대조된 모습때문이었을까....

 

내 내면의 진정한 어머니.... Maureen할머니!

어디 아픈데 없이 잘 계시져...

몇달전에 편지를 보냈는데...할머니의 주소가 행여나 바뀌었을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어요...

아무런 소식이 없길래...

제가 너무 무심해서 한참동안 연락을 못했네요

 

저 당신의 친손자 매튜처럼 아주 귀여운 아들을 저작년에 출산했어요

믿어지세요? 철닥서니가 애를 낳았다는게....

딸을 낳으면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모린'이라고 지을려고 했는데...

아들이라서 할머니이름의 끝자만 따서 '린'이라고 지었어요...

 

노티보이 매튜는 이젠 어엿한 청년이 되었겠네요...

할머니가족들 다들 잘 지내져?

모두들 저에게 한식구처럼 잘 해주었는데....

다들 넘 보고싶어요

 

언젠가 만날날을 항상 고대하면서

할머니가족들을 위해 늘 기도할께요...

 

조만간 또 편지띄울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