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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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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방에 묻힌 꿈들


BY ooyyssa 2003-01-22


오늘처럼 싸늘한 겨울 밤에 화장실을 가려면 여러번 결심을 해야 한다. 따뜻해진 이불 속을 빠져 나와 마당을 통과하여, 대문 위로 넘어 오는 풍속 15m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것도 차가운 변기에 스며드는 바람에 엉덩이를 내놓는 일은 정말 고역이다.

악조건을 이기고, 화장실에 다녀 왔다.
대문간 옆 화장실 맞은 편에는 창고방이 하나 있는데,여러 사람의
물건이 아프게 쌓여 있다.
오늘 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옷상자 다섯개와 큰 비닐 봉투 열장에 실려 들어 왔다.

물이 새던 허름한 슬레이트를 수리하고, 문을 달고, 작지만 방모양을 갖춰 놓을쯤, 외삼촌이 부도가 나서 갖고 있던 3층 건물이
경매에 넘겨졌다.
넓은 집에 놓여 있던 많은 살림은, 좁아진 집으로는 다 가져 갈 수가 없었고, 남겨진 물건들은 우리 창고 방의 첫번째 손님이 되었다.

'저승옷'이 들어 있는 증조 할머니의 낡은 궤짝위에는 친정 언니의 책들이 쌓아져 있다.
언니의 끝내 버리지 못한 방송대 국어 책이 슬프다.
이혼을 하고 새롭게 출발하려고 만난 사람과도 헤어지고,
하고 싶어하던 공부도 접었다. 나에게로 실려 온 짐 속에 들어 있던
와인잔 두개는 내내 내 머리를 울렸다.

벌써 두해가 되어 가는가?
친정집에 화재가 나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어머니가, 아들 집에서 사는게 불편하다며, 사들인 작은 가스렌지도 비행기에 실고 일본으로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우리 어머니 칠십이 다 된 나이에 엔화 벌러 떠났다.
어머니의 물건들도 무능한 나의 한숨처럼 한 귀퉁이에 쌓여 있다.
살아생전 저 가스렌지로 국이나 한 번 해 드실수 있을지?

오래된 옷들과 낡은 커텐들뿐인 이모의 살림은 그 성격이 보인다.
이모부와 서류이혼을 하고, 역시 엔화 벌러 간 이모는 내가 시집
올 때 만해도 꽤 넓은 집에 살았다.
이모부가 그다지 착실하지 못하고, 이모 또한 알뜰하지 못해서
부모가 물려준 재산들 조금씩 좁혀가다가, 전세에서 사글세로
옮겨가더니, 이모부에게 매일 얻어맞았다.
그리고 어느날, 불량거래자인 이모부는 이모 이름으로 무슨 창업자금을 받기 위해 이혼을 위장하려 했다. 이모는 잘됐다싶어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이사를 한다기에 오늘 이모의 짐만 싸들고 왔다.
근 이십년을 살아 그 집에서 완벽한 이모 물건은 유행 지난
옷들밖에 없었다.
이모는 평소 물건을 잘 사지만, 뭘 버리는 성격도 못된다.
2년이나 그냥 둔 서랍 안의 옷들은 여전히 차곡차곡 정리돼 있었다.
미혼일 때 입었음직한 옷들도 버리지 않았다. 미련이 많은 사람이다.
서랍은 그리 잘 정리하면서, 삶은 왜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을까?

창고 방에 쌓인 모든 것은 주인에게 다 아픔이다.
사라져버린 꿈의 껍데기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 짐과 함께 아픔도 나에게 맡겨놓았다.
보는 나도 아프다.
나라도 있어 그들의 짐을 밑아줄 수 있어 다행인건지.

창고 방의 물건들이 주인을 기다리듯 나도 모두가 다시
꿈을 찾아가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