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 프로그램중에 '언어 전달'이라는게 있다.
선생님이 일주일에 한 번 하나의 문장을 일러 주면, 엄마에게 전하고 그 얘기를 전해들은
엄마가 글로 적어 보내는 것이다.
딸 아이에게는 이게 늘 어려운 과제다.
선생님에게 들을 땐 생생했겠지만, 돌아오는 길에서 차 조심하면서 길 건너고, 친구 만나
인사하고, 지나는 사람 쳐다보고... 엄마를 보는 순간 다른 이야기만 하다보면 잊어 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또 어쩌다 생각이 나도 말이 글로 머리에 저장되는 훈련이 덜 된 아이는
'뭐더라?'하고 고민하다 일부만 전달하기 일쑤다.
아이는 어려서 그렇다쳐도 언어전달이라는 건 나에게도 사실은 어려운 과제다.
하루 종일 내가 뱉어놓는 많은 말들 중 과연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서 보니, 개미들은 더듬이에서 나오는 페로몬이라는 물질을 통해 상대방의 느낌까지 고스란이 전달되는 '완전한 의사 소통'을 한다던데,
인간에게 있어 언어는 개미의 페로몬이 되지 못한다.
말이나 글뿐만 아니라 손짓, 눈빛, 몸짓까지를 통틀어 언어라 한대도,
언어를 통해 '오해'가 아닌 '이해'를 줄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오해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경험에 비추어 남의 말을 받아 들인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려 아무리 노력한다해도 완전한 이해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나이가 들어 갈수록 강해진다.
잔디밭에 앉아 서로의 눈빛을 보며 친구랑 미래를 얘기하던 소녀 시절엔,
친구의 마음에 다가가려 무진 애를 썼던 것 같은데,
삼십대 아줌마가 되니, '저사람의 속 마음은 뭘까'하며 수사관같은 자세가 되니,
나도 이제 순수하진 못한가 보다.
내가 투명해야 상대의 모습이 비칠텐데, 내가 혼탁하니 상대의 생각이 흐릿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살면서 의도함 없이도 내가 내뱉은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상처 내기도 하고,
거꾸로 많은 말들이 내 가슴을 할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솔개처럼 말 안하고 살 수가 없으니,
가능한 내 마음 가까이 다가 설 수 있는 '지음'을 갈망한다.
" 진정한 친구가 나의 단점을 지적해 줄 수 있는 사람이란건 말장난이고,
진정한 친구는 말이죠.
단점을 그냥 덮어 주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넌 그 한가지가 가장 좋아'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친구라고 생각해요."
아침에 나의 동업자인 외숙모에게 궤변을 늘어 놓았다.
사실은 내게 그런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 친구를 만날 때가 가장 내 자신이 커다랗게 느껴진다.
그 친구랑 나는 서로를 보며 , '넌 보물이야'하고 말한다.
우리는 알고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서로의 마음이 같을 순 없지만,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 느낌은 옳은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상대를 응원해 주는 말이라는 것을.
친구를 위해 '넌 그게 잘못이야'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 잘못만 빼면 넌 완벽해' 하는 말이 잘못 자체를 지적하는 말보다, 더 상대를 발전하게 한다는 것을 알기에 칭찬의 말을 들어도아집에 사로 잡히지 않는다.
우린 둘 다 완벽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
더 나아지려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서로 힘돋워 주는 친구라 보물인것이다.
세상을 살아감에는 그 어떤 기술보다,
말하기 기술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내 딸 아이가 말을 전하려 애를 먹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말'은 전하되 '말뜻'은 전하지 못해 애를 먹는다.
어쩌면 평생 마음 한자락도 고스란이 보여주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으나,
내겐 그래도 더듬더듬 함께 느끼는 친구 하나 있으니,
완전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해도,
나의 '언어 전달' 과제는 성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