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흑인 여성이 예수 역을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15

참깨 밭을 지나다..


BY 남풍 2003-09-03

남편이 난데 없이 한바퀴 돌고오자며 집과 반대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차창 밖에 풀벌레 소리가 따라오고, 열린 창에 초롱한 별빛이  따라 온다.

 

풀냄새 가득한 농로를 따라 가는데, 참깨밭이 눈에 들어 온다.

건강하게 자란 줄기 끝에 은종같은  참깨 꽃들이 줄기 끝에 몇개 붙어 있고,

아랫쪽 줄기엔 솜털 뽀송한 참깨들이 잘 영글어 가고 있다.

 

"태풍이 불어 오겠는데...." 참깨 밭을 보며 내가 하는 말에

"추석 쯤에 한번 올라 오겠지." 하며 남편이 대답한다.

"난 저 참깨만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나."

말 끝에 가슴  아래서  뭉클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어머니는 여름내  땀흘려 참깨를 가꾸었다.

보리나 콩에 비해 고소득작물인 참깨는 어머니에겐  희망같은 것이었다.

여름 된 햇빛에 쑥쑥 잘 자란 참깨가 누리해질 쯤이 되면, 영락없이 태풍 소식이 들려 왔고.

태풍의 세찬 비바람 뒤엔 건강하게 잘자라던 참깨는  잘 여문 것일 수록 더욱  앙상하게 비어 있었다.

하얀 깨알이 빗줄기에 쓸려 내려 갈 때, 어머니의 희망도 떠내려 가 버렸다. 

 

어찌어찌하여 남은 것을 거두어, 두어 줌씩 모아 묶어 집 옆 돌담에 세워놓았다가,

저물녘 밭에서 돌아 온 어머니는 하루내 어머니 가슴처럼 바삭 마른 참깨 단을 거꾸로 잡고

도리깨질 했다.

툭툭 참깨의 작은 낱알이 터져 나오지만, 한 바퀴를 다 돌아도 모아지는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툭~툭 어머니의 소망도 터지고 말았을 것이다.

어쩌면 참깨 단을 두들겨 대듯 누군가를 두들겨 대고 싶었을 것이다.

 

태풍이 불어 오지 않는다면 참깨가 그리 귀한 것이 되지 않았을지 모르나,

 태풍이 없었다면

내 어머니 소망 한자락 이루고 살기 수월하지 않았을까.

 

어머니의 삶에서 만난 태풍이 참깨 하나 뿐이었을까.

밭 한퇘기 없이 농사지어 다섯 아이 키우며 사는 일 그 자체가 태풍이 아니었을까 .

 

만 몇백원하는 백설 참기름은 자꾸 비워도 어머니가 가꾸어 짜낸 참기름 한방울만 하지

못하고,

시집 간 딸에게 어머니는 벌써 몇해째 참기름을 보내 오지 않는다.

 

이제 참깨 키워 학비 낼 다섯 아이는 다 그만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었는데,

어머니는 오늘도 태풍 바람 아래 서있다.

 

어두운 밤,  참깨밭을 지나다,

어머니 생각만 깨알같이 가슴에 박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