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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세가지 기억-눈물


BY 개망초꽃 2003-08-18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여름 이맘때쯤 막내동생은 두살이였다.
태어날때부터 두눈이 유난스레 빛나고 초롱거렸다는   막내아들을 낳으신 기쁨도 잠시,
아버진 이리저리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구에서 살다가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어머니의 고향인 강원도로 들어오게 된거였다.

어머닌 막내를 업고 나와 바로 아래 남동생을 옆에 걸리고,
아버진 죽음을 앞에 걸리고 처갓집으로 처첨하게 오셨을 것이다.
맏딸인 나는 초등학교 신입생인 여덞살이였고
두 살 아래인 남동생은 여섯살이였다.

그 해 여름에 아버진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시며
엄마 말 잘 듣고 동생들 잘 돌보라고 하시면서 돌아가셨다.
난 그 말이 뭔 뜻인지는 알았겠지만 뭘 어떻게 해야 잘 하는건지 그걸 알았을까?
여덞살인 내가 죽음이 뭔일인지,삶이 뭔말인지,이별이 뭔지 알았으면 뭘 알았겠는가?

아버진 그리 모질고 냉정하게 28살인 아내와 딸 하나와 두 아들을 두고
밭두렁을 지나 냇가를 건너 산으로 산으로 두둥실 떠나가셨다.

아버진 돌아가시기 며칠전에 나를 부르셨다.
난 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아버지 옆에 가기가 싫었다.
마루끝에 앉아 아버지에 누워 계신 작은 방을 겉눈질을 해가며 보았을뿐이였다.
맨날 아프다며 화를 내시는 아버지가 무서웠기 때문이였다.
한약을 드시다가 먹다 남긴 약사발을 앞마당의 훽 집어 던지셨고
엄마에게 병에 찌든 얼굴로 인상을 쓰시며 소리를 지르셨다.
고통을 참기 힘들어 독한 수면제를 드시고 아버진 나를 부르셨나보다
큰이모가 빨래를 하러 냇가로 가시며
아빠가 급히 찾으시니 얼른 가보라고 하시길래 아버지가 누워계신 작은 방 문을 여니
아버진 퍼런액체를 토해 놓으시고 죽은 듯이 옆으로 누워계셨다.
난 살아 있는 아버지도 무서웠는데 죽어있는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 소리를 지르고 울었다.
그 소리에 놀라서 일어나신건지 아버진 정신을 차리시고
내 손을 꼭 잡으시면서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하시며 아버진 같이 우셨다.
나는 놀래서 울고 아버진 내가 불쌍하고 자신의 죽음이 처참하셔서 우셨을 것이다.
한참을 울고 있으니 엄마도 옆에서 울고 이모도 울고 외할머니도 마루끝에 앉아 울고 계셨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아버진 떠나가셨다.
지독한 병에서 떠나가셨고 끔찍한 고통에서 떠나가셨고 불공평한 세상에서 떠나가셨다.

어머닌 아버지를 보낸 그 다음해부터 우리 삼남매를 외할머니와 이모댁에 맡겨 놓고
돈 벌면 우리들을 데리러 오신다며 서울로 가는 산고개를 훌쩍 넘어가셨다.

우리 삼남매는 그때부터 호박 넝쿨처럼 얼기설기 헤어지며 엉켜가며 살았다.
어느해는 나와 바로밑 남동생과 살았고
어느해는 나와 막내동생이 내 옆에 있고
어느해는 나 혼자 저녁 노을이 벌겋게 물든걸 바라보곤 했었다.

물론 난 고생은 했다.
그러나 엄마만큼은 아니라고 해야한다.

어머닌 아버지 상여에 매달려 산동네가  떠나가라고 우셨다.
스물여덞 젊은 여자가 남편을 잡아 먹었다고 동네사람들이 수근거렸고,
어떤 노인네는 나보고 너가 아버지 잡아 먹었지 하셨다.
그래서 엄마는 고향이 싫다고 하셨다.
난 철없는 어린나이라서 초록 치마를 둘러 친 산이 정겹고
풀꽃이 피고 감자꽃이 하얗게 피는 밭이 예뻤고
구불텅한 논두렁길에 놀래 자빠지는 개구리가 재미있는데
울 엄마는 가난이 지겹다 하셨다.아버지가 생각나 싫다고 하셨다.

엄마는 고향이 싫기도 했지만 먹고 살려고 서울로 가는 산고개를 넘어 가셨다.
난  뽕나무에 올라가 동요를 부르며 노을이 꿀꺽 넘아갈 때까지 엄마를 기다렸다.
서울로 떠난 산고갯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되면 참으려해도 눈물이 줄줄 나왔다.
외할머니한테 혼날까봐 세수를 하러 돌아오는 길 옆 또랑물로 가면
또랑가에 피어 있던 보라색 꿀풀이 내 눈물을 말려주었다.
꿀풀에 들러붙어 있는 벌을 휘휘 쫒아내고 꿀을 쪽쪽 빼먹다보면
눈물도 마르고 보고싶은 엄마도 잊어버렸다.
철딱서니가 없어서 아버지의 소중함도 보고픈 엄마도 가난의 불편함도 몰랐던 나이였으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는 나를 서울로 전학을 시켰다.
서울은 산골보다 풍요롭고 행복하게 잘 사는 줄 알았다.
엄마는 밤이면 매일 쪼그리고 앉으셔서 기도를 하셨다.
"하나님,삼남매가 남부럽지 않게 잘 자라서 잘 살게 하옵시고(남보다 못하게 난 살고 있다)
 학교에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하옵시며(머리가 된적은 한번도 없었다.)
 병이 들어 병원비로 돈이 나가게 않게 하시고
(약해 빠졌어도 심하게 아픈적은 없었다.이것만 들어주신 하나님이시다.)
 장사가 잘 돼 남한테 꾸지않게 하옵시고(장사가 안돼서 비싼 일수돈을 쓰셨다)"
그러다가 어느사이 엄마는  뭔말인지 모르게 흐느끼며 기도를 드리셨다.
"아~~바~~지~이~~흐흐흐흑~~~불쌍으~안~~~으흐흐~~우리 자 식~~~드을~~~으흑흑~~~"
그럼 나도 불꺼진 방에 누워서 엄마처럼 코로 입으로 귀로 눈물이 흘러들어갔다.

내겐 아버지라 불리우는 사람이 없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마지막으로 내 손을 잡고 흘렸던 눈물만이 3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남아있다.

강아지풀과 모시대가 무성한 길가에서 놀고 있던 나와 동생에게
이모가 전해주던 아버지의 죽음.
상여에 매달려 울부짓던 남편을 못떠나 보내던 젊은 여자와
매일밤마다 기도하시며 울던 내 엄마의 눈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