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작은 아이가 집에 돌아올 시간이 지났음에도 오질 않아서 걱정스런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있는 중에 벨소리가 울렸고 작은 아이가 들어섰다.
아이의 입에는 무언가를 먹은 흔적이 있었고 또 급하게 할 말을 입에 머금고 있었다.
\"엄마,우리 반 아이가 떡볶이를 사 주었어.돈을 2만원이나 가지고 왔어.\"
나는 걱정스럽게 자초지종에 대해 물어 보았다.
아이는 나를 놀라게 하는 말을 해 주었다.
반아이의 아빠가 로또복권에 당첨되었는데 17억원이라는 금액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워낙 떠들썩하게 들어 왔던 로또복권이었지만 그런 행운에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나에게도
그 정도의 금액이라면 1등이었으리란 짐작이 들게 했다.
그러나 너무 금액이 컸던 탓인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고 아이의 말도 솔직히 곧이 들리질 않았다.
히지만 그 뒤로도 아이는 그 친구로부터 계속 무엇인가를 얻어 먹었다며 늦게 오곤 했는데
그제서야 걱정이 된 나는 다른 엄마에게 그 사실을 확인해 보았다.
그 엄마도 그저 나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크게 수선을 피우며 알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그저 확률적으로 벼락 맞기보다 더 힘들다는 그런 엄청난 행운이 가까이에서 벌어질수도 있다는 사실만이 신기하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안 며칠뒤 학교에서 돌아온 작은 아이가 무슨 통지문을 꺼내며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동아일보 기사에도 나중에 실리게 될만큼 다급한 내용이었는데
같은 학교에 재학중인 초등학교 2학년 아이의 가정에 도움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네 살때부터 암이라는 병마와 싸우고 있었는데 간호하던 아이의 엄마마저 같은 병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집도 팔게 되고 모자의 간호를 위해 아버지마저 직장을 그만 두게 되어서
한 달에 천만원씩이나하는 병원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니 온정을 베풀어 달라는 그런 절박한 내용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같은 부모의 입장으로서 그 가족의 마음을 헤아려보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슬픈 마음이 되었다.
마침 그 때가 큰아이 성적결과가 나와서 모든 신경을 성적에 촛점을 맞추고 있었던 때라
그 소식을 접하고 보니 새삼스럽게 내가 참으로 헛되고 헛된 것에 매달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아프게 느끼게 되었다.
잠깐 그 힘든 이웃을 생각하며 안타까워 하던 나는
어느새 그들의 불행에 비추어 나의 헛된 욕심을 거두게 되며 느끼는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러운 다행함을 가지게 되었다.
`아,살아 있음이 감사하구나.
건강함이 감사하구나.
아이때문에 속상한 것은 아이가 내 곁에 있기 때문이고
남편때문에 힘든 것도 남편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이고
내 생이 고단하게 느껴지는 것도 내게 주어진 삶이 있기 때문이리라.
어둠이 있기에 빛을 느낄 수 있듯 어떤 고통이 있기에 찬란한 기쁨도 느낄 수 있고
절망이 있기에 간절한 희망도 가질 수 있는 것이구나.\'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투덜거리며 내게 주어진 것들을 벗어 던지고 싶어 하는 맘 생기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잠시 소박한 행복에 감사를 느꼈다.
며칠 사이로 그렇게 극명한 행,불행을 접한 나는 다시 한번 작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원래부터 물욕이 별로 없던지라 대박같은 행운을 그리 기대하지는 않던 나였지만
정말로 내가 얻고 싶어 하는 것은 그저 평화로운 작은 행복임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게 된 것이다.
지난 주의 성당주보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
네 잎 크로바는 행운을 나타내고 세 잎 크로바는 그 꽃말이 행복이라는 글이었다.
우리는 우리 발 밑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세 잎 크로바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하고
그저 막연히 어떤 행운을 기대하는 맘으로 네 잎 크로바를 찾기에 힘을 쏟는 경우가 많다.
그것처럼 내가 갖고 있는 소담스런 행복은 미처 고마운줄 모르고
한번에 움켜쥘 수 있는 행운에만 맘을 쏟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언젠가 사람의 일생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에는 총용량이 정해져 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그 행복은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각각의 개인들이 그 나름대로 느끼게 되는 그런 행복이다.
한꺼번에 대박이 터지는 사람에겐 더 이상의 어떤 행복에도 마음이 무디어져서 결국은 행복불감증이 생기게 되기가 쉽고
그와 반대의 경우에는 작은 것에도 크게 느끼며 만족하기 쉬우니 결국 행복을 느끼는 정도의 양은 같다는 것이었다.
즉,가난한 사람의 삼겹살 놓인 한 끼 식사의 달콤함과 부자의 풍요로운 진수성찬 차려진 한 끼 식사의 만족이 크게 다르지 않음일 것이다.
앞으로 내 책갈피에는 네 잎 크로바 대신 수수한 세 잎 크로바 잎이 예쁜 콧망울 방실거리며 단 꿈 꾸며 자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