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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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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산행, 긴 여운


BY 복어공주 2003-08-02

장마는 이런 걸까?
으스런 새벽녘부터 아침까지 제법 줄기차게 딸구던 빗줄기는,
곶감 준다는 말에 뚝 울음을 그쳤다는 옛 얘기 속의 아이처럼
언제 그랬냐는 "뚝" 비를 그치고 구름사이로 빙긋이 햇살을 비추인다.
그리고 이내 들려 오는 매미의 울음,
7년을 곰삭였던 그리움의 소리가 장마사이의 가녀린 햇살을 붙들고 하소한다.
한 계절만 사랑하게 해 주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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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 바쁜, 한 철 매미의 울음만큼이나, 우리의 여름 또한 바쁘다.
바다로, 계곡으로, 가족과, 친구들과,
밀리는 도로에 서서 피하는 일(피서)이 있더라도 어디론 가를 가야만 하고
그 시작과 끝은 언제나 주부들의 몫,
여름날의 소낙비처럼, 이렇게 몇 번을 정신없이 후두둑이다 보면,
어느 새 여름은 저만치 물러서고,
하루의 끝자락엔 서늘함이 묻어 와 우린 곧 슬픈 가을의 앞에 서게 된다.

큰 눔의 휴가로 몇 일이 술렁였고,
고국을 찾은 조카들과, 옆지기의 휴가로 또 며칠이 술렁였다.
그리고 또 토요휴무와 함께 이어진 이틀 간의 바깥생활.
어디서 무얼하며 어떻게 보냈는지?
집으로 돌아 온 지금은 새로운 휴가증후군의
병마로 삭신이 쑤시고 지끈거리지만,
그래도 참고미소띄며, 떠올릴 수 있는 한 가닥 짧은 얘기가 있다.

토요일이었다.
같은 또래의 부부 4팀,
느직이 아침을 털고 일어나 만난 시간은 11시30분.
여벌옷만 챙겨 배낭을 끌고 나선 약속의 장소엔 사람만큼이나 짐들도 많았다.
아이 하나 딸린 사람 없는데, 무슨 먹거린 저리도 많이 준비했는지?
어쨌거나, 내 손길 가지 않았으니, 준비한 사람들에게 고마움 느껴야 할 일.

대진고속도로를 지나, 88고속도로를 타고 내려 선 곳은 인월.
그리고 달려간 지리비경 뱀사골.
계곡은 한산했고, 장맛비에 불어난 계곡의 우렁찬 물소리만이
폭양을 기다리는 것 같다. 계곡주위로 노란원추리가 군락을 이루고,
물가엔 간간이 사람들도 보인다. 그러나 뛰어 들기엔 아직 물은 차가운 것 같다.

달궁으로 향하다, "인심좋은 덕동마을."이란
마을 어귀의 길다란 안내판이 마음에 끌려, 덕동에서 짐을 내리고,
하루를 묵어 갈 잠자리를 정했다. 아드님의 이름을 따서 상호를 지었다는 동원산장,
그리고 쥔마님은 진주님이라니.
고향까마귀라 더 반가이 맞아주리라 믿으며.....

앞마당에 차를 세우고 우선 먼저 출출한 속을 채우기 위해 숯불을 지폈다.
그리고 길다란 석쇠 위에, 길다란 장어를 올려놓고, 쇠주 한잔씩을 먼저 따라,
멋진 휴가를 위한 축배의 잔을 들었다.
빈속을 스치고 내리는 찌리리한 쇠주의 맛,
익어서 뒤틀리며 돌아눕는 장어 한 점을 집어, 쌈에 싸서 입으로 넣으니,
그 맛을 어찌 말로 표현하리요.
혼자 꿈꾸는 오후의 일정이, 멋진 추억으로 이어질 것 같은,
묘한 감흥의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밭에서 돌아오신 할머님께 한 접시 구워드리니, 산중에 귀한 바닷고기라,
쌈과, 약주(여자들만을 위해 준비했던 술?)를 곁들여 맛나게 드시고는,
아들자랑, 며느리자랑, 방방곡곡 사위들 자랑에 시간가는 줄을 모르신다.
사위들이 전국에 많은(특히 대구) 이유를, 매표소에서 입장료 아까워,
장모님댁 간다고 핑계들을 댄다지만,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인정스런 농담들.
출출했던 속도 채우고, 마음도 채우고,
우리의 일정은 또 새로운 시작.
저녘식사를 맛나게 준비 해 주십사 부탁드려 놓고, 여름햇살이 누그러지는 오후 4시,

음주의 무법자는 뱀사골로 내려간다.
반천은 붉적인다, 우리가 지나치는 시간만 해도, 한산하게 느껴졌는데,
오후에 갑자기 사람들이 몰린 것 같다. 와운교 앞까지 차로 오르려든 생각은 무산되고,
간이 파출소 옆 주차장에 간신이 차를 세우고 바삐 서둘러 산행을 시작한다.
함께 한 사람들에겐 가는데 가지 갔다가 돌아오자고 했지만,
나와 옆지기의 꿍꿍이는 이끼폭포다. 아니, 나의 소원이다.

포장길을 버리고 산책로를 따라서 계곡을 오른다.
바위를 때리는 물소리가 우렁차다. 가끔씩 다녀가지만, 올 때 마다 새롭고
신비론 지리의 품이 감사할 따름, 이제 아름답다는 탄성보다는
숙연함으로 재워지는 날들이라고 할까?
장마 끝의 등산로는 길길이 물길이고, 바위마다, 풀섶마다 이끼를 피워
마음은 벌써 이끼폭포를 헤매인다.
물기 젖은 칩칩한 숲 사이론 가녀린 까치수염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각색의 산수국은 침침한 그늘을 밝힌다.

병풍교, 명성교, 옥류교, 대웅교, 물길을 인도하는 많은 다리와 계단들,
병같이 생겼다는 병소의 커다란 암반위엔, 보라색 비비추가 예쁘다.
길은 완만하고 좋지만 마음은, 발걸음을 쫓아, 온몸을 물덩이로 만든다.

한 시간, 두 시간,
하산을 서두르는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지는데,
쉬임없는 옆지기의 발걸음은 계속 앞으로 전진이다.
이끼폭의 초입은 어디일까? 내 소원은 이뤄질 수 있을까?
따라 오르든 계곡이 두 개로 갈라지는 이름 없는 철교.
계곡엔 어둠이 내리는 흐린 날의 오후 6시.

옆지기가 멈췄다.
등산로 아니라는 안내판 뒤로 또렷한 길이 이끼폭으로 가는 길인 것 같다.
함께 한 일행들에게, 40여분 오르면 이끼폭이 있는데,
보고가지 않겠냐는 얘길하니 모두들 고개를 흔든다. 어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하산을 권유하고 둘이서 이끼폭으로 향한다.

가파른 오르막을 잠시 올라, 산죽비탈을 지나서, 허물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땀을 쏟는다.
산길은 어둑해지고, 옆지기는 달려가고, 길은 미끄럽고 험하기만 한데,
음침한 숲 속은 정글 같고, 으렁이는 물소리는 사람을 덥치려는 짐승 같다.
그런 와중에도 이끼폭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강렬했고,
다래나무 덩쿨을 헤쳐가는 팔 다리엔 불쑥불쑥 힘이 솓는 듯 했다.

출발 25분,
주위의 느낌들이 조금씩 달라지는 듯했다.
새파랗게 쑥숙 솓아오른 이끼손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뒤엉킨 다래 넝쿨을 뒤지고 다가서니, 오랜 세월 속에 썩어 내린,
통나무 계단의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계단 양옆으론 누가 심어 놓은 것처럼
큰 이끼손 들이 자라고 있었고, 어디에서 본 듯한 낯설지 않는 풍경이 있었다.
계곡건너 저 만치에 옆지기의 배낭 보이고,
흐리게 땀을 훔치고 서 있는 옆지기의 모습이 보였다.
시간은 30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허겁지겁 겁도 없이 계곡을 건너 다가서니,
작고 아담한 폭포가 있다.
새파란 이끼위로 부채살 같은 물살이 작은 포말들을 흩날리며 떨어지는 이끼폭포.
푸르른 이끼를 쓸어안는 물소리가.
산죽밭의 싸락눈 소리같기도 하고,
모래톱에 속살거리는 작은 파도소리 같기도 하고,
샤워기 부스의 물소리 같기도 하고..........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 답답한 가슴.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한 표현이 생각나질 않는다.

새침하고, 정갈하고 단아한.
깊은 숲속에, 내 마음 깊은 곳에 푸르른 그리움의 생채기 하나.
시냇물의 졸졸거리는 얘기도, 모래톱에 조잘이는 파도도,
바위덩이에 부딪히는 계곡의 물소리도 언제나 나서면 들을 수 있는 얘기지만,
이끼속으로 파고드는 물살의 속삭임은 누가 들을까?
마음의 자갈, 마음의 이끼, 내 마음의 자갈이 돌돌이는 소리,
내 마음의 이끼가 속삭이는 소리, 그런 마음으로 살고픈데,
그러기엔 너무나 허황스런 마음의 사치.

이끼폭위로 제2, 제3폭이 더 아름답다는데,
아쉬움 남긴 채 5분의 짧은 감흥을 가슴에 재우며
숲속의 어둠을 타고 오든길을 되돌아 하산을 서두른다.
원점으로 돌아오니 7시, 꼭 한시간의 이끼폭 산행을 했다.

아직 계곡의 남은 하산길은 만만찮다.
랜턴이 있지만 더 어두워지기 전에 하산을 해야한다.
하늘은 점점 짙은 어둠을 내리고 있다.
거의 달리기에 가까운 숨가쁜 바른 걸음,
몸뎅인 어디서 그렇게 많은 땀을 쏟게 하는지?
수분의 섭취도 없었는데, 3번째 사우나만큼이나 많은 땀을 쏟고 있다.

한시간을 달렸을까?
저 만치 야영장의 불빛이 보이고 먼저 간 사람들의 꽁무니가 보인다.
반천교위에 서니 8시15분.
깊은 계곡에 불빛 화려한 새로운 도시가 있고,
한 나절을 달려온, 지친 달구지들이 불빛 아래서 휴식을 취한다.
그냥 가기엔 아쉬웁고 타는 목마름,
화려한 반천의 상가에서 하산주 한 잔을 설주로 마시고,
늙은 애마가 기다리는 숙소로 향하는데, 행복한 내 기분을 헤아리라도 한 듯
어둠 깃든 달궁의 야영장엔, 가녀린 축포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우리를 기다리는 숙소의 처마끝으론, 오색 불빛이 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