銀婚式을 맞아
차 한잔의 여유를 가지려는 찰나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 오후 6시에 여의도로 나오세요! 잊지 말고 꼭 나오세요! 역에 도착하셔서 전화하면 곧 모시러 나갈께요."
전화선 멀리 아들은 내 말은 필요 없다는 듯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은혼식(銀婚式)날, 오늘이 동지 날이자 결혼 25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가 대학생 주제에 돈이 어디 있다고 나오라는 거야! "
나는 한편 가벼운 기대감에 부풀면서 오늘을 잊지 않고 기억 해 주는 아들이 대견해 살며시 웃음이 나왔다.
"흥! 이런 전화는 남편이 해야 되는 것 아냐! "
나는 곧 과묵한 남편에게 불만의 화살을 쏘아붙였다.
역에 도착해 전화를 하고 출구로 나가 보니 딸이 기다리고 있고, 5분도 안돼 아들이 나왔다. 두 애들은 내 양손을 잡고 하늘 빼곡이 높은 빌딩 숲을 한참이나 돌아, 어느 음식점 앞에 멈춰 섰다.
"엄마! 이곳 음식이 맛있기로 소문난 집인데요, 유명한 T.V talent가 하는 집 이예요."
아들이 사촌 형들과 월 모임을 이 곳에서 하는데, 음식이 맛있다고 언제고 내게 사주겠다던 말이 생각났다. 두 애들은 사람들로 가득 찬 홀을 지나 한 켠으로 나를 인도했다. 문이 열리자 폭죽이 터지고 박수 소리가 났다. 남편이랑 딸, 그리고 아들 친구들 여럿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딸은 사온 cake에 불을 부치고는 빨간 장미 스물 다섯 송이를 내게 주며
"엄마! 내 한달 용돈을 다 털어 사온 거예요. 다음 달은 두 배로 주시는 것 잊지 마세요! " 한다.
한바탕 선물 받느라 정신이 없는데, 아들이 술을 따라 부어 주자, 딸이 남편과 팔을 엇갈려 love-shot을 하란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두 분의 결혼 25주년을 축하합니다∼"
애들은 박수를 치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축하는 무슨 축하! 입 꾹 다물고 사는 너희 아버지하고 사느라 이렇게 늙었는데……"
나는 옆에 있는 남편을 흘겨보며 한 마디 했다. 그러자,
"그럼 노래 다시 하겠습니다. 시작! "
"잘 참으셨습니다.∼ 잘 참으셨습니다.∼ 우리 엄마 25년 동안 잘 참으셨습니다.∼"
애들은 생일 축하 곡에 개사(改詞)한 말로 노래를 부르며 내게 마음에 드실 거라며 연신 노래를 불러 댔다. 남편과 나는 애들의 재치에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음식이 나오자 맛있게 먹으며, 지나간 얘기를 주고받으며 정담을 나누고 있는데, 아들이 맞은편에 있는 남편을 정색을 하며 부른다.
"아버지! 엄마가 저 연세에 평소에 철없으신 듯 젊은애들처럼 말하고 행동하시는 거 아무나 못해요. 저는 엄마가 귀엽게까지 보이는데 아버지는 엄마가 귀엽지 않으셔요? 아버지가 조금만 맞춰 주시면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시겠어요! "
"음……,그렇게 하도록 노력해 보마 !"
남편은 어렵게 한마디를 내 뱉고는 나를 쳐다보며 씩 웃는다. 죽을 때까지 그이의 무거운 입을 자주 열게 하기는 틀렸다고 체념하고 사는지 오래건만, 아들은 나를 생각할 때 그 점이 매우 안타깝게 생각 됐던 모양이다.
별 다른 일이 없으면 온 하루를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서 보낼 때, 어쩌다 아들이 먼저 귀가해 늦도록 혼자 있는 나를 보면, 꾀나 내가 쓸쓸해 보이는가 보다. 그럴 때면 다음 날, 아들은 근사한 카페에 데려 가 차를 사 주기도 하고, 젊은애들이 많이 가는 곳에도 데려가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쳐다보며 흐뭇해하곤 했다. 이렇게 좋아하는 자그마한 일을 왜 아버지는 못 하시냐며 가끔 남편에게 얘기하는걸 들은 적이 있다.
남편은 내가 어딜 가자면 말없이 동행해 주곤 하지만, 스스로 나를 이끌어 가자고 하는 법은 한번도 없는 그런 사람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지난 25년이 빠른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고, 나는 잠시 흘러간 세월에 빠져들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남은 생을 어떻게 보람있는 삶으로 보낼 수 있을까?
이제 와 후회되는 점은 없는가? 남편과 애들에게 사랑을 쏟아 이 가정을 꾸려 왔는가? "
잡다한 생각들로 집에 다다른 지도 모른 채 있는데 아들이 짧은 적막을 깨고 차 문을 열었다.
"엄마! 다음 금혼식 때는 장가도 들고 손자도 있을 테고 돈도 벌고 있을 테니 멋지게 해 드릴게요. 건강하세요! "
아들은 너스레를 떨며 내 손을 잡아 내려준다.
25년 전 오늘은 눈이 발목이 차도록 와서 나를 더욱 설레게 했건만, 오늘은 찬바람만 불뿐 남편에게서도, 날씨에서도, 그 어떤 것에서도 그 때의 설레 임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말없이 손잡아 주는 남편과 애들을 쳐다보며, 이런 것이 행복이겠지 하며, 25년 후 금혼식 때는 축하 노래를 개사(改詞)해 부르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은혼식의 하루는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