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막 스무살이 되었을때 내 뒷모습만이라도 좋다며 쫓아다니는 아이가 있었다. 내가 학교실습으로 짜증낼때도 그저 어색하게 씩 웃어주던 걘 언제나 내 편 이었었다. 간호대를 졸업하고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걘 체력적으로 약해빠진 날 걱정하면서도 내가 못되게 굴어 맘 한구석이 아팠을텐데도 그게 다 자기탓 인것처럼 날 밀어내지도 못하고 맘속에서 끙끙대며 날 기다려준 애였다.
그날은 내가 제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밤근무 였었다. 내과병동인지라 밤에도 응급상황이 많았고 아직은 미숙한 병원생활이 낯설어서 두려움이 많았던 신졸때 하필 장마비가 무섭게 그어대고 있었다.
군대땜에 휴학하고 있었던 걘 내게 전화조차 하지 못하고 집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고 긴장탓에 깊은잠을 못자고 겨우 뒤척이다 깨서 예민해진 내게 ''''''''힘들지.. 내가 데려다 줄께..'''''''' 하며 내 눈치를 살피더니 차 문을 열어줬다. 아빠한테 허락 받고 나온거니깐 괜찮다고 안심시키는 걔한테 나 그때도 ''''''''올꺼면 나 좀 더 자도 되는데 넌 전화도 안하냐..'''''''' 하고 톡 쏘아댔고 걘 ''''''''미안해..''''''''하면서 고갤 떨궜다.. 말없이 침묵이 흘렀고 얼마가지도 않아서 비가 제법 쏘아대더니 갑자기 윈도우 브러쉬가 작동이 안됐다. 근처 카센터까지 찾아가는데도 시간이 걸렸고 난 근무시간에 늦을까봐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걘 더 안절부절 했다.. 다행히 윈도우 브러쉬는 고쳤지만 난 지각을 했고 걔한테 말도 안되는 짜증과 말투로 걜 많이도 아프게 했었다. 날 위해 어렵게 허락 얻어서 차를 빌려서 나온거란걸 너무도 잘 알았지만 그땐 걔가 참 미웠고 답답했다..
이사 일정이 잡혀서 물건 정리를 하다가 결혼전에 병원생활 하면서 써왔었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날씨가 흐릿해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 오후 맘이 심난해져왔다. 뭐든 해야할것 같아서 물건정리나 할 작정으로 열어본 붙박이장 한구석에는 몇권씩되는 일기장이 너무도 신기하게 밀려져 나와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열어본 일기장엔 그 기억이 모두 숨어 있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로 남편으로 너무도 자상하고 성실한 걜 떠올리고 내가 좀 너그러웠으면 좋았을것을 하는 아쉬움과 걔에 대한 미안함과 어릴적 내 편이 되어줬던 걔가 많이도 보고싶었다.
어쩌다 길 가다 운좋게 만날 행운이라도 내게 주어진다면 그땐 내가 너무 몰랐었다고.. 널 밀어낸 내 맘 이해해 달라고.. 아니 널 밀어내고 나 많이 미안해하고 있다고.. 잘 살고 있다고.. 너도 잘 살라고.. 대신 나 널 고마워하고 있다고.. 그런말이 지금은 아무소용이 없겠지만 그래도 맘속에 담아뒀었던 말을 하고나면 희미해진 기억속에서 헤어나올수 있는 탈출구가 될것 같았다.
갑자기 빗소리가 더 크게 울려대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난 꿈꾸고 난 어린아이처럼 멍청하게 일어섰다. 지금 내가 할수있는 일이라곤 서둘러 쓸쓸한 맘 한구석을 달래내고 일기장을 덮어버리는 거였다. 그리고 알수없는 안도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기 내 일기장속에 내 기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