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무 시절.
그 당시의 연인이자 지금의 아내로부터 오는 연서 중에 낯선 분홍빛 편지 한 장이 끼여있었다.
겉봉에는 외오촌 질녀의 이름이 예쁘게 적혀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아내의 연서는 제쳐두고 얼른 질녀의 편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의례적인 인사와 안부. 정겨운 소식에 이어서...
''이제부터 외아재를 오빠라고 부르고 싶어요. 오빠라고 부르게 해주세요.''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본 건 그 아이가 갓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 고등학생이던 외사촌 형들의 시골행에 묻어서 외갓댁을 찾아갔던 내 국민학교 6학년의 겨울방학 때였다.
외사촌 누나가 시집이라고 갔다가 남편의 심한 행패로 혼인신고도 못한 채 헤어지면서 데리고 온 갓난 아이. 아이만 친정에 맡겨두고 돈벌어 오겠다고 떠나버린 외사촌 누나로 인해 엄마에게서도 버려진 아이. 아비와 어미에게 버림받은 불행한 아이였다.
강보에 쌓인 채, 스스로 작은 몸 하나 뒤집지 못하면서도 그 아인 젖 달라고 열심히 울어대고 있었다. 새로 사귄 시골친구들과 해질 때까지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노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던 나에게 그 아이는 밤이면 잠들이지 못하고 빽빽 울어대는 귀찮은 아이일 뿐이었다.
그 아이의 외할머니가 되는 나의 큰외숙모.
일제 시대. 유행처럼 번져간 지식인들의 좌경화에 물들어 좌익활동을 하다가 광복 후 실종 되어버린 큰외삼촌의 아내. 오랜 세월 딸 둘과 함께 시어머니인 외할머니를 모시며 남편 돌아오기만 손꼽아 기다리며 사신 한 많은 분이셨다.
외할머니 또한 맏아들의 좌경화로 인해 광복 전과 광복 후, 뒤이은 6.25 전쟁까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념의 틈바구니에 끼여 겪으신 고초가 적지 않으셨다.
그런 집안의 어두운 그림자 때문이었을까...?
그 아이는 아무 환영도 없이 축복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인정스럽게 맞아주시는 외할머니와 외숙모 덕분에 그 겨울방학 이후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매 방학 때마다 외갓댁을 찾는 것은 내 중요한 방학 일정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질녀는 내가 들릴 때마다 늘 키가 한 뼘 이상씩 자라있었고 통통하고 복스러운 아이로 변해갔다.
외사촌 누나는 오래 전에 새로운 남자를 만나서 살림을 차렸고, 그 사람의 아이 둘을 낳으며 잘 살고 있었지만 친정에 버려둔 전 남편의 아이를 돌볼 처지는 못되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시골친구들은 대부분 도회지로 공부하러 혹은 일하러 떠나버리고 외갓댁을 들려도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다보니 자연 그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미리 가져간 책을 보고있으면 수줍음이 많은 그 아인 멀찍이 떨어져서 내 관심을 끌어보려고 애를 쓰곤 했는데, 마침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손짓해서 부르면 아주 반가워하며 쪼르르 달려왔다.
그 아이 손을 잡고 산과 들을 헤집고 다니노라면 그 아인 자기가 아는 많은 것을 나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했다. 꽃 이름이며, 산에 사는 곤충 이름이며, 솔방울 따는 법, 좁은 논두렁을 안 비틀대며 걷는 법...등등. 내가 칭찬이라도 해주면 수줍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천성이 맑고 밝은 아이였다.
군 입대를 앞두고 외갓집에 인사차 들렸을 때...
외숙모는 진지하게 그 아이를 어찌하면 좋을 지 나에게 물으셨다. 이제 국민학교 6학년이 된 그 아이를 중학교에 보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공부는 곧잘 하지만 중학교 월사금이 만만치 않다던데...걱정을 하시면서...
시동생들을 위해 있는 논 다 팔아버린 여자들만의 시골 살림이니 오죽했으랴...
해 놓은 것 아무 것도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병으로 군에 입대를 해야하는 내 처지를 보면 이래라 저래라 말씀드릴 처지는 아니었지만, 어렵더라도 꼭 중학교만은 시켜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씀드리곤 방을 나와 질녀를 불렀다.
"아재 말 잘 들어라..." 국민학교 6학년이면 이제 제 처지를 알 나이라...먼저 제 처지를 설명한 다음,
"꼭 중학교에 들어가거라.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한 다음에 니 외할머니가 고등학교를 공부시킬 여력이 없다 싶거든 공장에 취직해라. 대신 꼭 부설 실업계 고등학교가 있는 공장에 취직해야 된다. 친구들과 노느라 한눈 팔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라. 일단 고등학교 공부를 마치면 그땐 또 니 길이 보일 거다. 알겠나?"
"예." 진지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지 대답하는 어린 눈매에도 굳은 결심이 서리는 게 보였다.
"자~ 약속하자." 오랫동안 새끼손가락 걸어 약속을 했다.
.
.
이제 갓 사춘기에 접어든 중학교 2학년인 질녀에게 답장을 썼다.
''그래. 아재를 오빠라 부르고 싶거든 언제든지 오빠라 불러라. 아재가 네 오빠가 되어주마.''
그 아이는 약속을 지켰다. 아니 약속 이상의 것을 해냈다.
중학교를 마친 후, 실업고등학교가 있는 공장에 들어가 주경야독 열심히 공부를 했고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 공장에서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간호대학을 들어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고향을 떠나 온 외숙모를 모시면서도 간호대학을 장학금 타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고, 대학 병원 간호사로 들어가 많은 환자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주는 환하게 잘 웃는 간호사로 명성을 얻고 있다는 장한 소식을 나는 계속해서 들을 수 있었다.
그 약속한 날 이후로 서로 바쁜 삶의 여정 속에 아직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나를 좋아했던 이제 삼십대 초반 나이의 내 질녀는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처지가 비슷한 외로운 남편의 아름다운 아내로, 사랑과 축복 속에 태어난 아이들을 사랑하는 인자한 엄마로, 한이 많은 외숙모의 복덩이 외손녀로서, 친척들의 입에 자랑으로 오르내리는 사람이 되어 굳건히 제자리에 서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첫사랑이 된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큰 기쁨이다.
이제 삶에 있어서는 나의 스승이 된 내 질녀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