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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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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戀歌


BY 이화 2001-09-09

우리 앞집은 4층 다가구 주택이다.
요즈음 유행하는 아파트 식으로 지은
빨간 벽돌집으로 반지하에 옥상에 올린
옥탑방까지 해서 4층이다.

옥탑방에는 이십대 후반의 아가씨가 산다.
동네에 있는 고갈비 술집에 나간단다.
옥탑방에서 계단을 내려오다 보면
우리집 거실과 주방이 빤히 내려다 보여서
식사를 하든가 TV 를 보다가 고개를 들면
아가씨와 눈이 마주치곤 한다.

여러번 골목에서 마주쳤건만 아가씨는 한번도
아는 척 하지를 않는다.
처음에는 내 쪽에서 목례를 했는데
아가씨가 인사를 받아주지 않아서
요즘은 나도 덤덤하게, 소 닭 쳐다보듯이 지낸다.

이사오고서 처음에는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아가씨가 외출을 하면서
빈 맥주병이 가득한 큰 비닐봉투를 대문 앞에
내놓고서 총총히 사라지는 것이다.
혼자 사는 아가씨가 왠 술을 저리 마시나...?

키도 작고 체구도 자그마 하고, 외출할 때면
항상 자전거를 타고 나가는 모습이 이뻐보였는데
그날의 빈 맥주병 사건으로 아가씨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내게도 이십대 후반의 여동생이 있어서
혼자 산다는 아가씨에게 자꾸 관심이 갔다.
혼자 살면서 밥은 제대로 해 먹나?
부모님은 어디 멀리서 사시나?
이제 결혼도 해야 할텐데......

그렇게 마음이 쓰이는 거였다.
여름방학이 되어 앞뒷문 활짝 열고
하루종일 고함 지르며 애들과 실랑이 하며
더위와 싸웠던 올여름에 나는 새로운 사실을
또 하나 알고 말았다.

오후 1시쯤 우리 가족이 점심식사를 할 때 쯤이면
우리집 강아지가 앞집을 향해서 미친 듯이
짖어대는 것이었다. 식탁에서 얼굴을 들고 보면
조심스레 옥탑방으로 들고나는 남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결혼도 안한 아가씨 혼자 사는 집에 왠 남자일까...
한번은 작심을 하고 빨래 너는 시늉을 하며
계단을 올라가는 젊은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평일날 술집 나가는 아가씨 집에 들락거리는 남자라면
말 안해도 뻔한 남자가 분명할 것인데도 말이다.

그 남자는 나의 시선을 피하면서 음료수가 든
비닐봉지를 앞뒤로 흔들며 옥탑방으로 들어갔다.
옥탑방 아가씨를 찾는 남자들은 매일 다른 사람이었고
시간대도 일정했다.

사전에 서로 연락이 되는 것인지 그 남자들은
앞집 대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오고 그 열쇠는
옥탑방 아가씨가 창문 밖으로 던져주는 것이었다.
치킨을 사들고 오는 남자도 있었고,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을 들고 오는 남자도 있었다.

이웃들이 다 알고 보는 상황에서
아가씨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드나드는 남자들은 하나 같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멀쩡한 남자들이 대낮에...

앞집 주인 아저씨는 옥탑방 아가씨의 직업이 뭔지
아직 모르신단다. 전직 교사 출신이신 주인 아저씨가
그녀의 직업을 안다 해도 별 수는 없겠지만
참 먹고 사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아가씨는 밤에 술집에서 일하면서 만난 남자들과
다음날 낮에 즐길 약속을 미리 해두는 모양이었다.
여긴 주택가이고 앞뒷집과 아래 윗층에는
어린 학생들도 살고 있다.
아가씨를 보는 내 눈길이 달라질 수 밖에.

모른 척 하려 해도 매일 바뀌는 남자들이 출입할 때 마다
자기 본분에 맞게 충실히 짖어대는 강아지 때문에
나와 아이들은 싫어도 아가씨의 애정행각 아닌 행각의
증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어제는 계단을 내려오는 아가씨를
오래도록 마주 보았다.
언제나 표정 없이 눈이
땡구란 아가씨도 나를 힐긋 쳐다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과 머리염색을 진하게 했다.

옷은 언제나처럼 새하얀 옷을 아래위로 입었다.
자기 생활에 대한 반증인 것일까?
그녀의 옷은 유난히 하얘보인다.
차고에서 꺼낸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도
CF 의 한장면처럼 상큼하건만...

그녀가 처음에 나의 목례를 받아주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그녀와 면을 튼 다음 그녀의 직업에 대해,
그녀의 생활방편에 대해 알게 되었다면
그 난감함을 어찌 했을고.

생각과 표정이 정직하게 일치해서
거짓말을 못하는 나에게
그녀를 경계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이웃이라는 이유로 외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더라면...

앞집 주인 아저씨만 빼고
이웃들은 옥탑방 아가씨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
무심히 보아 넘기려 해도 솔직히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내 가슴이 떨리고, 그녀가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다녀도
언제 부러질지 모르는 갈대처럼 위험스러워 보인다.

젊음은 길지 않다.
쉽게 돈을 버는 방도로 그 길을 택했다면
짧은 청춘에 비해 혹독한 댓가를 치를 것이라고
인생의 선배로서 말해주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