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밑 2센치미터의 단발머리에
하얀 카라가 달린 교복이 내게 어울리던 시절.....
열 일곱 푸르른 꿈은 알토란 같이 여물고 있었는데
교정의 플라타너스와 등나무 그늘은 늘 재잘대는 여고생들의
풋풋함으로 싱그러웠다.
여고를 갓 입학했을 때 합창단을 뽑는다고
음악시간에 테스트를 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방송이 나왔다.
몇반의 누구 누구는 지금 음악실로 오라는 내용의.....
영문도 모르고 불려간 음악실에는 음악선생님과 그리고
나와 또 한 아이가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아이는 국민학교 시절 방송국에 어린이 노래자랑에서
함께 노래를 하던 그 아이였다.
선생님께서는 그 아이와 내게 전교생 중에서 제일 목소리가 좋으니
성악공부를 해 보라 하셨다.
그 아이는 집안에서 의대에 가라고 하신다고 노래를 않겠다고 했다.
그 때의 나는 사실은 계속 성악을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S대에 가려면 마치 그 학교 교수님께 레슨을
받아야만 하는 것처럼 말씀하셨다.
오남매가 줄줄이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라 나는 바듯이 수업료를
내고 학교에 다니는 형편에
차마 나만 잘되겠다고 부모님께 턱도 없이 큰 액수의 레슨비를
부담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참기로 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여자 음악선생님을 만나서 방과후면 으레껏
선생님들의 개인지도를 받곤 하였다.
어느 정도의 발성법 훈련이 되어 있던 내가 그런 말을 듣는 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사춘기의 나는 참 많이도 방황을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의 사업은 기울고 엄마는 아프시고
집안은 점차 기울어만 갔다.
살다보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버리고 마는
어떤 귀로에 놓일때가 있었는지......
부뚜막에 밥을 안치고 영어 단어를 외우고 줄줄이 세명의 동생들
의 도시락을 싸야 했던 나는 그야말로 학생가장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땐 엄마가 살아계셨으니
힘든 줄은 별로 모르고 살았다.
자리 보존하고 누워계실지언 정 내가 이불빨래를 자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해도 옆에 계신 것과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는
참으로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영어라는 과목과 친해진 계기는 중학교 1학년 갓 입학했을 때
영어선생님의 첫수업에서 내게 노래를 하라고 시키셨는데
그때 목감기에 걸쳐서 도저히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상황이라서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던 일이 있었다.
그 일 이후로 내내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을 씻을 길 없어
영어공부라도 잘 하면 그리 되려나 했다.
그 덕분인지 영어 과목은 늘 앞서가는 아이가 될 수 있었다.
내가 대학에 갈 즈음에 우리 집의 형편은 정말 최악에 까지
다다랐다.
학력고사를 치르고 원서를 내야 하는데
아버지께서는 내가 가정의 살림에 도움이 되길 바라셨다.
우수한 시험성적이었음에도 난 내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학교로
진학을 하던지 아니면 직장에 취업을 해야만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 동안 후회하고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버지의 회사를 찾아가서 한참을 울고 불고 하면서
마지막까지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겠노라고
나는 집을 떠날 결심까지 하고 매달렸다.
그동안의 내 노력이 너무 헛되이 버려지는 느낌이라
필사적으로 그랬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그 때의 아버지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팠을 까 ......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아마도 아픈 마음으로 딸을 달래며 그 겨울 따뜻한 짬뽕 한 그릇
으로 내 허기를 채워주셨던 것 같다.
몇날 며칠 동안 이불을 쓰고 두문불출하며 울었다.
운다고 해결되는 일도 없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3학년때 담임선생님은 원서마감때가 다 되도록 오지 않는
나를 참 많이 기다리셨는지 학교에서 일을 하는 직원을 시켜
내게 지방에 있는 야간대의 영문학과에 지망을 한 원서를
보내셨다.
그 때의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알량한 자존심은 나로 하여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학교에
나를 디밀고 싶은 생각은 아예 일지도 않게 했다.
나를 참 많이도 아껴주시던 3학년때 담임이셨던 그 선생님께는
지금까지도 죄송한 마음이 남아있다.
나중에는 등록이라도 시켜주면 휴학해서 자신의 힘으로라도
나니겠다고까지 하였으나
그것조차 여일치 않았는지 나의 의견은 끝까지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그 때의 내가 아마 좀더 되바라진 아이였다면
집을 나와서라도 공부를 했지 싶다.
나는 우물안 개구리처럼 학교와 집 밖에 모르는 아이인지라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많았던 것 같다.
그 당시 군대에 가 있었던 오빠는......
내가 보낸 편지를 읽고 많이 울었다고 했다.
자신이 군대에 가 있지만 않았어도 나의 공부를 뒷바라지 했을
거라는 말을 제대 후에 몇번이나 했었다.
내가 지금의 직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을 때
난 아버지의 얼굴에 비친 기쁨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무엇인가 기댈곳이 필요할 만큼 힘들게 세상살이를 해 내고
계신 아버지에게 난 그렇게나마 도움이 되어야 했었나 보다.
여고를 졸업하고 열흘만의 첫출근을 앞두고
아버지께서는 내게 자켓과 주름치마, 그리고 블라우스, 스타킹
을 사주셨다. 구두한켤레와 함께.....
그리고 내게 하시는 말씀이
"그곳에는 대학 안나온 직원도 많이 있다더라
기죽지 말고 일 잘 하거라"였다.
아마도 학교 생활처럼만 한다면 무리가 없다는 표현이었으리라
그때부터 지금까지 20대와 30대를 거쳐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까지 때때로 지겹다는 느낌을 섞어가며 그렇게 나는 한 곳에
몸담아 왔다.
직장엘 다니면서도 별별 공부를 다 하며 호시 탐탐 기회를 노리며
비상을 꿈꾸며 살았다.
하지만 세상일이란게 마음대로 다 되어지는 것은 아닌가보다.
무어그리 질긴 인연인지 아직까지도 나는 그 인연의 끈을 부여잡고
그리 살고 있다.
아버지에게 나는 언제나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잘 굴러가는
기차인양 나는 언제나 그렇게 착하기만 한 딸이어야 하는건지
꼭 그래야만 했는지
아직도 내겐 아쉬움이 채 가시질 못하며 그리 살고 있다.
하지만 이제 난 먼 훗날 내 아이가 정말 공부가 하고 싶다고
내게 매달릴 수 있는 아이로 다만 그리 자라나기만을 바라는
나는 아이들의 엄마로 남아있는데......
부디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내 아이들에게 잘 말해줄 수 있는
나는 좋은 엄마로 살아야지.....
지금의 나는 능력있는 엄마가 되어 언제나 내 아이들에게
든든한 배경이 될 수 있기만을 바래본다.
딸아이가 치는 피아노에 맞추어
잊고 지내던 나의 목소리가 다시 태어나는 날
그 날을 기다리면서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칠 수 있게
스스로 알아서 나 자신이 공부할 수 있는
나는 또 그렇게
내 나름의 행복을 건져내고 있을테지.....
내게 못다한 꿈이 남아있다면
이제는 살포시 접어 곱게 넣어 두고 살아야지
나는 그래야지
내 아이들에게만은 못다 이룬 꿈이 남지 않게
정녕
나는 그리살고 싶은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