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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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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다면...


BY snow31 2003-05-21

다시 태어난다면….
또다시 집안에 복잡한 일들이 터지고, 작은 결정 하나 내 맘 가는 데로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가족과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 의해 이끌려 주저하고 고민하게 될 때…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작은 집 하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파트 베란다 앞 창문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린다.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오늘 오전에, 정말 아주 오랜만에 단순히 수다를 떨기 위해 만난 친구들과 여자의 진짜 인생은 어디에 있을까를 이야기 했었다.
“진짜 여자 인생이 어디 있냐? 한 사람으로서의 인생은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서 끝나는 것 같아.”
나는 그렇게 내뱉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도 답은 아닌 것 같다.
대학 시절 여행을 보내달라고 졸라대던 내게 아빠는 ‘결혼 하면 남편이랑 실컷 다닐 수 있으니까 지금은 참아라’고 했었다.
직장 시절 해외근무의 기회가 왔지만 시집도 안간 여자를 밖으로 내몬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신 부모님.
그리고 생각 없이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 적당하다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생각지도 않게 아이를 둘이나 낳고 지지고 볶으며 이것이 다 그렇고 그렇게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얘기를 위안 삼아 살아온 나는 그러나 가끔씩 불쑥 불쑥 솟아오르는 의심덩어리를 버려둘 수가 없다.
결혼 8년차, 겨우 서울 가장 끝자리에 작은 아파트 하나 마련하고 사는 내게 남편이 사라져 버린다면 나는 경제력도 없고 사회적 기반도 없는 노숙자 그 자체이고, 아이들 둘에 대한 양육의 최소한도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력자이다.
나는 30대 중반이 되는 지금까지 정말 목숨을 다해 좋아해본 일도, 밤을 새워가며 인생에 대해 고민을 해 본 일도 없었던 것 같다. 하다 못해 밥벌이를 책임지기 위해 걱정하며 죽어라 일자리를 구해 보지도 않았고, 그저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살다보니 정말 챙피하지만 어떻게 살아진 것 같다.
결혼해서는 시댁 식구에게 사랑받으며 가족이 화평한 가운데 절약하며 열심히 살림을 하면 행복이 찾아오는 줄 알았고, 요즘 시대에 맞게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며 창의적인 아이로 키우기 위해 정보도 찾고 모임도 가지며 아이들 교육에 신경을 쓰면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고, 당당한 삶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남편과 아이들을 동반하지 않고 거리를 나서게 되면(물론 그럴 일들이 너무도 너무도 드물지만) 나는 어깨를 펴고 걷는 것 조차 왠지 어색하고,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있는 내가 그리도 초라해 보일 수가 없다.
거리에서 2000원 짜리 삔을 살 때도 언제부터인가 내 느낌으로 결정하기 보다는
“언니, 요즘에 어떤게 잘나가요, 전문가가 골라주세요.” 하며 괜히 아쉬운 사람이 부탁하는 듯한 헤픈 웃음을 날리기 일쑤이고, 혼자서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 뭐가 모자른 사람이 거리를 쏘다니는 듯해서 얼른 언제나 들리는 슈퍼에 가서 안사도 될 두부 하나를 사고 다시 ‘나는 언제나 가정의 건강을 생각하는 알뜰한 주부다.’ 하는 거짓 꾸밈으로 나를 치장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다.

회식이 있다고 늦게 온다는 남편이 12시가 되어도 소식이 없으면 이사람이 어떤 여자와 수작을 벌이는가 싶어 별별 상상을 머리에 떠올리며 결국 내머리에 쥐를 내며 괴로워하고, 간만에 어쩌다 남편과 단둘이 한 외식에서는 오직 이야기의 레퍼토리는 우리 큰애가 이렇네, 작은 애가 저렇네 하는 신변 잡기적인 이야기만 줄줄줄… 그리고 어색함, 침묵.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시댁의 트집에는 쩔쩔매면서 아이들의 조그만 칭얼거림에도 참지 못하고 구박을 하는 나.
집안 행사에는 수십, 수백만원 나가는 것이 당연한데 내 팬티 3개에 4천원 하는 것도 돈을 건네주는 순간까지 과소비는 아닌지 고민하는 나..
이제는 소설책 하나 사는 것까지 너무도 아깝고 쓸데없는 소비라는 생각에 화를 내는 나.


휴…..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태어난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스님으로 태어나거나, 아니면 다시 내가 태어났을 때 똑 같은 그 시점의 나,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그때는 아주 징그럽고 지독스럽게 고집스러운 기집애로 태어나서, 피아노를 배우고 싶으니 신문배달을 하겠다고 추운 겨울에 두 손 다 부르터가며 신문을 나르겠고, 그림을 배우겠으니 딸을 살리고 싶다면 말리지 말라며 손에서 붓을 놓지 않을 것이며, 구박받고 맞아가며 “내가 왜 이런 딸을 낳았나, 전생에 무슨 죄를 졌다고’ 하는 부모님의 원망 속에 역마살 낀 사람처럼 이구석 저구석을 온 세상을 싸돌아다닐 것이고, 밥을 굶고 추위에 떨어도 정말 내가 죽어도 좋아하는 일을 꼭 찾아 그 일에 미쳐버릴 것이고, 혹 내가 그래 죽는다해도 남겨진 이가 슬퍼하지 않도록 내 뒤에 사람을 남기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이머리를 스트레이트를 해야 하나 웨이브를 해야 하나 고민하지 않게 삭발을 해 버리거나 짧은 스포츠 머리로 세상을 살아가 볼 것이다.

평생 나도 모르게 내 인생을 구원해 줄 백마 탄 왕자를 꿈꾸고 살았는데, 내가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평생 내 자신을 의식하면서 내 자아를 스스로 일구고 내 자아를 스스로 충족시키는 노동으로 새벽부터 컴컴한 어둠이 올 때까지 치열하게 살다가, 쓰러져 잠이 들면 세상이 사라진다해도 모를 만큼 달콤한 잠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하지만 나도 정말 100% 확신 할 수는 없다.
정말 내가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가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