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를 찍어 편지를 썼던 땅끝마을까지 닿았던 꿈이 있었다.
11월 가을날.
덕수궁 은행잎이 샛노랗게 물들던 21살 때.
바닷가 소년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우린 이렇게 꿈처럼 수채화처럼 편지로 우연히 만났다.
편지속에서 꽃씨가 주루루 떨어지던 봄 날
그 씨를 화단에 심고 기다리던 꿈.
가랑잎에 시를 써서 내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 가을도
난 잊을 수가 없다.
일곱개의 네잎크로바와
길고 긴 장문을 썼던 편지들...
그렇게 4년을 편지로 주고 받았던 젊은날의 꿈.
우린 남녀라든가
세상살이라든가
현실의 아픔이라든가... 뭐 그런걸 쓰진 않았다.
계절의 변화와, 고향얘기와...
소년은 바다의 속살거림을
나는 산자락의 한들거림을 얘기 했었다.
애송하는 시를 베꼈고
걸음마 과정인 자작시를 썼고,
인사도 결론도 없는 산문을썼었다.
나보다 더 예쁜 글씨의 소유자였고,
나보다 더 감상적이였던 편지 친구.
젊은날의 내 꿈을 편지속에 끄적거려 먼 곳을 떠나 여행을 했고,
소년이 살고 있는 바닷가에 꿈을 남겼다.
내가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였고
내가 제일 잊을 수 없던 사람이였다.
그러니 꿈은 깨어지는 허무함이 있었다.
시인이 되겠다던 바닷가 소년은
내 꿈이 깨어질 때처럼 내 곁에 둘 수가 없었다.
15년이 훨씬 지난일이지만
지금도 책방에 가면 시집을 뒤적거린다.
시인이 되고싶다던 소년의 이름 석자가 있나 하고서...
잊혀질만큼 많은 시간이 지나갔지만,
내 일기장에 그 소년은 바다로 남아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다.
바다여!
나를 추억하나요.
하얀 원피스 입고 방파제를 걸었던 그 날을 기억하나요.
바다색을 닮아 파란 군복을 입었던 사람.
한마디 말은 없었어도,
나를 자신의 사랑으로 꿈꾸었던 사람.
예쁜 이름 지어 나에게 주었지만
한번도 불러 보지도 못했던 수줍던 사람.
키가 크고 얼굴이 커서 해바라기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바다여!
어디에 있나요. 아직도 남쪽에 살고 있나요?
같은 하늘아래 같은 땅을 밟고 우리의 젊은날을 그리워는 하나요?
시인이고 싶다던 꿈, 혹여 접고 있지는 않나요.
꿈을 접지 말아요.
내 꿈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연연히 이어 가고 있어요.
바다여!
북쪽 일산을 알고 있나요.
너무 멀리 떠나와 있군요.
여기도 해가지고 해가 뜨고 있지요.
이곳은 봄이 늘정거리고 겨울이 급하게 오지요.
남쪽은 겨울에도 봄기운이 완연하고 겨울에 꽃이 핀다지요?
눈물처럼 떨어지는 동백꽃이...
아아! 그랬군요.
눈물처럼 우리의 젊은날은 가고, 꾸득꾸득 마른 잎만이
마흔이라는 세월만 남겼네요.
바닷가 소년과
산골 소녀가 만났던 젊은날의 순수했던 꿈이 있었다.
편지로 또박또박 만나
편지로 얼룩얼룩 헤어졌던
젊은날의 아련하 추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