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잎의 여자 -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듯 보일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것은 아무것도 안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같은 여자, 슬픔같은 여자, 病身같은 여자,
詩集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같은 슬픈 여자
20대 초반의 깨끗하고 순수했던 얼굴이 박힌 사진 뒷면에 끄적거려
놓은 시 한편이다.
많고 많은 詩중에서 왜 저 詩가 선택이 되었을까..
웬지 모를 끌림에 메모해 두었던 빛바랜 사진 하나를 들추어 낸 것은
내가 올랐던 산의 주종나무가 물푸레나무였기 때문이다.
하이얀 꽃가루가 날리어 앉은듯한 푸른 잎 사이에 피어 있었던 꽃이
은은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물푸레나무....
어휘에서 풍기는 부드러운 나무 이름이 어쩐지 나와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듯..
친근감이 다가와 오래전에 내 사진 뒷면에 적어 놓았나보다.
5월의 싱그런 바람 속, 산과 또 하나가 되는 날이었다.
작년 태백산행을 시작으로 산악회 가입후 늘상 동행했던 남편을
혼자 두고 참석하려 하니 이빠진 듯 허전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었다.
계절의 여왕 5월이라더니...
많은 사람들이 행사에 참석하느라 반 정도 줄어든 23명만이 버스에 올라,
환하게 밝은 아침 서로의 웃는얼굴로 인사를 나누며 울진군에 위치한
백암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넓게 앉은 좌석에 못이룬 잠을 자느라 고개는 좌우 운동을 심하게 하면서
잠시잠시 뜬눈으로 바라 본 아침바다...
정녕 내가 사는 동해바다란 말인가..
은빛물결이 출렁이는 고요만이 감도는 아침바다의 모습에 선잠이
달아나 버린다.
산악회 가입하여 3년만 산행을 하면 전국 각지의 산을 다 돌수 있다고 한다.
늘 산행을 하고 싶어도 묶여 있다는 이유로...바쁘다는 이유를 핑계로
가까운 산을 두고도 가지 못했던 나..
8번의 산행에서 가을과 겨울 그리고 지금 이 계절을 산에서 느끼고 보아왔다.
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을 한 것인가..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산행을 시작하였다.
산 초입엔 아카시아 꽃잎이 금방이라도 터트릴 듯 소담스럽게 제자릴
잡고 있었다.
곧 피어 성숙한 자태를 자랑하리라...
벌써 그 향내가 코끝을 스치는 듯한 느낌이 든다.
5월 산....
아직 활짝 열지 않은 잎새들과 제모습을 다 드러낸 잎새들..
짙지 않은 그 색의 아름다움을 어디에 비교할까..
젖내나는 아이의 모습이 연상됨은 여린 색에서 오는 느낌일 것이다.
부드러움...연약함...청순함 등등의 단어들이 떠 오른다.
조금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山勢는 완만해 보이는 가운데 연하고
진한 녹색들의 어울림이 아름다운 그림 하나로 내 눈에 들어온다.
무상으로 우리 인간들에게 베품을 주고 있는 자연...
자연은 인간에게 베푼다는 생각없이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상 만물중에 오직 인간만이 남을 위해 은혜를 베풀었다는 생색을
내고 있을 뿐이다.
올라가는 산길 주변에 고개를 내밀고 쑥 나와 있는 산나물들..
도시에서 자라 고사리나 냉이 도라지 외에는 전혀 알길이 없는 나물들을
어찌나 그리 잘 아는지 몇몇은 보이는대로 뜯어 봉지하나 가득 채우신 분들도
있었다.
중순이 지나면 독성이 생겨 먹을수 없을 정도로 쎄어진다고 한다.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던 백암산...
힘든 고비마다 낙엽들이 가루가 되어 주단을 깔아 폭신함을 주었고...
5월의 싱그러운 바람소리와 더불어 들려오는 새소리 그리고 온갖
나무들에게서 나는 향내는 그간의 피로함을 싹 씻겨 나가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하고도 남는 보약과도 같은 내음들이었다.
전문 산악인 못지않은 우리 회원들의 발걸음은 내가 쫓아 가기에는
무리였지만 드문드문 쉬면서 기다려주는 마음씨와 오가는 정에서
산과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좋은 모임임에 틀림없었다.
하산이 빨라 여유있게 온천욕을 하다보니 제일 늦게 버스에 오르는 실수를
저지르고 회원들의 농섞인 야유로 우리 모두를 다시한번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 넣으며 백암산행의 막을 내렸다...
이처럼 일상에서의 모든 오욕들을 산속 깊은 곳에 떨구고 나는 돌아왔다...
반성과 다짐을 하면서...
울창한 숲 속에서의 하루는 내 중년속의 한 페이지다.
중년의 삶이 점점 더 살찌워져 가듯 5월의 산은 녹음이 제 빛깔을 찾으면서
짙어져만 가고 있다
하얀 꽃 얹은 물푸레나무...
'후'하면 날아갈 듯한 연약한 모습을 표현했던 시 한편을
다시 한번 중얼거려 본다.
** 경북 울진군 백암산 (1004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