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저녁식사를 하고 나니 아줌마가 산책을 나가자고 조른다.
좀 늦은 시간이라서 피곤도 한데 가자고 하니 얼른 내키지 않았다.
더구나 비도 올 것 같아 가다가 비라도 맞으면 기분 별로일텐데.
그러나 어쩌랴, 가주지 않으면 내일 아침 밥상에 반찬이 나빠질테니.
그래도 한 마디 했다.
"야, 동네 사람들이 이상하게 봐, 밤늦게 총각하고 유부녀가
돌아다닌다고!"
그러니 한 수 더 뜬다. 이제 애를 둘이나 나았으니 절대로 지고
살 아줌마가 아니다.
"어, 요즘 아줌마들 다 총각애인 하나씩 있다더라!"[뭐야, 이
아줌마가 간이 배밖으로 나왔군. 아니면 NBJR(내배째라)인가]
간단한 복장으로, 우산을 하나 들고 집을 나선다. 집 근처에 구립
공원이 하나 있어 언제든지 산책을 갈 수 있어 좋다. 가는 길에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오래 살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
사람들이다. 이웃집 아저씨, 미장원 아줌마, 슈퍼집 총각...다들
친근한 얼굴들이다.
산길에 들어서니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무
들이 앙상한 가지만 있어 멀리까지 훤히 보였었는데 이제는 푸른
잎으로 꽉 차 있어 가까이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인간은 나무들이
내뿜는 산소를 마시고 나무는 인간들이 만드는 이산화탄소로 살아
가니 이 얼마나 기막힌 조화이고 상부상조인가! 감사하여라, 조물
주의 은혜가!
얼마를 걸어가니 조금씩 비가 내린다. 준비해 간 우산을 펴든다.
산길을 우산을 들고 걸으니 새로운 기분이 든다. 이제 어둠이 찾아
와 컴컴해진다.
비가 오고 늦은 시간이니 산에 오는 사람이 없다. 사실 늦은 시간에
산에서 사람을 만나면 반갑기보다는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 사람 소리가 들린다. 공원길에
사람들이 앉아서 쉬라고 만든 정자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녀가
있다. 더구나 여자애는 교복을 입었다. 여자애는 앉아 있고 남자애는
여자애 다리를 베고 누워있다. 아마 다른 곳에 있다가 비가 내리니
급히 피한 거 같다. 여자애가 남자의 얼굴을 만지면서 히히덕거린다.
이 늦은 시간에 왜 산에 와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줌마에게
한 마디 했다.
"쟤네들 저러다 사고치는 거 아녀?"
그러니 아줌마가 즉시 대꾸한다.
"저 나이에 저런 자세로 함께 있으면 둘 다 짜릿짜릿하겠구먼!
지금은 좋지만, 나중에 얼마나 고생을 할까, 쯧쯧"
얼마 전에 보았던 미혼모 실태 방송에 나온 미혼부, 미혼모들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한 때의 불장난으로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수많은 청소년들. 또 낙태로 죽어가는 생명,
생명들. 나이로 봐서는 우리 집 애들 또래로 보이지만 뭐라고 말하
겠나. 그 시간에 산에서 만난 애들한테 용감하게 집에 들어가라고
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무슨 피해를 당할 지 모르기 때문에.
한참을 걸으니 약수터가 보인다. 몸이 풀리면서 물이 먹고 싶어진다.
다가가 한 바가지 퍼서 나눠 마신다. 정말 시원하다. 내가 한 마디
한다.
"아줌마야, 깨끗이 먹지 바가지에 루즈 묻었다. 이리 되면 간접
뽀뽀가 되잖아!"
"속으론 좋으면서 뭘 그래. 다른 여자가 그랬으면 얼싸 좋아라
했을 거면서!"
내가 말을 말아야지. 해봤자 이제 본전도 못찮는데 말이다. 아,
결혼 전에 내 앞에서 수줍음 떨던 것은 다 내숭이었단 말인가!
산길을 돌아 집 가까이에 오니 지난 달 결혼한 신혼 부부가 다정히
손을 잡고 걸어간다. 참 다정해 보인다. 우리도 저런 때가 있었
는데 하고 생각을 하는데 아줌마가 얼른 다가와서 팔짱을 낀다.
"아니, 이 아줌마가 왜 이래. 평소에 않던 짓을 다하구?"
"응, 저 신혼부부 모습을 보니 응근히 질투가 나서. 갑자기
깨소금 냄새가 여기까지 풍겨오네. 흥, 누군 신혼시절
없은 줄 알구! 재섭서"
"야, 질투는 난다고 해도 왜 재수까지 없니? 그 심보부터
고쳐야 복 받는다."
"이제부터 우리도 함께 밖에 나오면 항상 손 잡고 다니자"
"싫어. 날두 더운데 무슨 손까장 잡고 다니니."
집에 들어오니 더 후덥지근하다. 한 시간 가량을 걸으니 몸은
가뿐한데 땀이 나는 것이다. 간단히 샤워를 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저녁 뉴스를 보고 잠자리에 든다. 옆에 데리구 자는 아줌마가
자지 않구 달려든다.
"우리 껴안구 자자! 아까 그 신혼부부가 자꾸 생각나서 그래."
"아줌마, 싫네여. 나 힘도 없구 더워!"
"좋았어. 내가 싫어졌단 말이지. 신혼 때는 매일 하자구
보채구서는... 내일 아침 당신이 차려먹구 가. 나 피곤해서
늦게까지 잘거야!"
"아아... 알았어."
아이구 내 팔자야. 열분, 지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되나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