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문고에 가서 마땅히 읽고 싶은게 없어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강의실에서 읽는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박완서)이라는 책을 빌렸왔다.
여러 단편을 단행본으로 묶은 것인데
차례를 보니 몇몇 단편은 이미 읽은 것이라는 걸 알았다.
옛우물(오정희),빈처(은희경),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이혜경)는
확실히 읽은 것이라는 걸 기억해 냈다.
그러나 나머지는 생소했다.
그런데 감자 먹는 사람들(신경숙)을 몇페이지 읽다 보니
전에 읽었던게 생각났다.
그리고 사소한 날들의 기록(조경란)도 처음 몇줄을 읽고 보니
이것도 전에 읽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민둥산에서의 하룻밤(김형경)을 한참 읽다가
(거의 반도 더 넘어 읽었다) 보니 어느 대목에서
아 이책도 읽었었던 것이구나 하는걸 깨달았다.
그러나 끝까지 다 읽지 않을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용이 도통
어떻게 됐는지 기억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11편의 단편 중에서 4편을 읽기위해서 이책을 빌린 꼴인데
그렇다면 내가 늘상하고 있는 책읽기를 내가 왜하고 있지 싶은
생각이드는 것이다.
그책을 읽고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고 읽은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다면
굳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없는것 아닐까 싶다.
전에 쥐스퀸트의 단편집에서 건망증인가 하는 제목의 글에서
자기가 읽고 밑줄까지 쳐놓은 글을 읽으면서
누군지 모르지만 나와 같은 공감을 했구나 싶어 무단히 그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흐뭇해 하기까지 했는데
다 읽고 맨 나중의 메모를 보니 자기가 그 책을 읽고 몇줄의
감상까지 써 놓은 것을 보고 그 밑줄을 그은 사람도 자기였다는 걸
깨달는 이야기 였는데 내가 그 짝이 난것이다.
눈에도 별로 안좋고 이 참에 책읽기를 집어치워버려?
평생 즐겨해 온 일인데 그럼 뭘하지?
옛날 교과서에 실렸던 시적 변용에 대하여란 글 중에
핏속에 용해되어 나의 혈관을 타고 돌며 나의 의식을 만들어 준다라는
글을 떠 올려 보며 위안을 삼아야 할까
이래저래 좀 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