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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세 번째 봄을 맞으며


BY 용숙 2003-04-29



2월의 마지막날을 며칠 앞두고 하필이면 그 날 억수 같은 진눈깨비가 내렸다.

결혼 할 때, 하나밖에 없는 딸의 결혼이라며 어머니는 모든 혼수품을 사러 갈 때마다 동행하였다.
미아리의 어느 농 방에서 고심 끝에 선택한 장롱.
커피색에 가로줄 무늬가 죽죽 나있는 볼수록 맘에 드는 장롱이었다.

결혼 후, 그렇게도 많은 이사를 하며 이리 치고 저리 치고 하여 군데군데 상처가 나있던 그 장롱과 드디어 이별을 하였다.
남편의 전근지로는 더 이상 가져갈 수 없었으므로 처리를 놓고 고민한 끝에
나의 장롱을 반기는 그 동네의 치킨집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

결혼 13년 만에 내 손을 떠나가는 나의 장롱을 보며 함께 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라 아련한 감상에 젖어 한 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

빗속의 이삿짐 싣기가 처음은 아닌 듯,
능숙한 솜씨로 이삿짐아저씨는 수 시간에 걸쳐 짐을 다 싣고, 영덕 어디쯤에선가 만나기로 하며 빗속을 뚫고 총총히 사라져갔다.

정신 없이 짐을 옮기느라 온몸이 다 젖는지도 몰랐다.
남편과 아이들도 같은 형편이었으나 경황이 없는지라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되었다.

이미 날은 어두워 졌고, 그칠 줄 모르는 눈비는 여전히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혹시라도 잊은 것은 없는가 싶어 살던 집안을 다시 돌아보며
어제까지도 잠자던 방안에서, 아직까지 내 가족의 냄새가 구석구석에 남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지금도 그 산골의 그 집, 그 방은 내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도장처럼 남아있다.

중요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고추장 단지와 컴퓨터를 차 트렁크에 특별히 따로 싣고는
삼 년을 살았던 그 산골, 그 마을을 황망히 떠나오며, 또 다른 세계로의 모험을 시작하듯, 쏟아지는 빗속을 달리며 조금도 섭섭하지도, 아쉽지도 않았다.
그것은 내게 있어 탈출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으므로.....

그러나 나는 그런 희망의 모험심도 잠시, 또 다시 갇혀 있는 생활을 시작했다.
딱, 처음 며칠만 새로운 곳에의 호기심과 신비감으로 지루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세 번의 봄을 맞으며 여전히 나는 또 다른 세계로의 동경과, 머지않아 맞이할 탈출을 꿈꾼다.

다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외로움이었다.
아이들도 남편도 모두 새로운 곳에 잘 적응하며 그 들 나름대로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언제나 내가 문제였다.
어제 만난 가게 집 여자의 말처럼 어느새 이곳생활도 삼 년째를 맞이했다.

남이 보기엔 어느새 이지만 나로선 이제야 삼 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생각 해 보면, 지난 것은 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슬며시 ‘어느새’ 세 번째 봄이 왔구나, 하는 여유가 생기기도 한다.


허옇게 쌓인 눈을 뚫고 새순이 돋아나듯 봄이 왔고,
또 다시 여름 오고, 겨울도 올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똑 같다는데,
왜 이렇게 마음은 먼 데만 보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