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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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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27) -- 지진(earthquake)


BY ps 2003-04-05

틀림없이 꿈이었다.
운 나쁘게 잘못 찾아 들어간 건물이 무너지는 바람에 갖혀버린 채
희뿌연 먼지 속에서 이리저리 돌아봤지만 어느 곳에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고,
'지금 꿈을 꾸고 있는거야'라는 의식이 있었음에도
갖혔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온몸을 감싸안았다.
그러다, 혹시 이게 꿈이 아니면 어떻하지? 라는 불안한 생각이 드는데
어디선가 조그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구조의 손길이라 느껴지는 순간
두려움이 가시며 눈이 떠졌다.
그러나, 휴~~하며 한숨을 내쉬는 내게 꿈속의 소음이 연결되듯 어둠속에서
방의 창문이 마구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흔들거리기 시작하는 침대...

"지진인가봐! 무서워~~"
이상한 기척에 잠이 깬 순이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몇번 겪은터라 몇초 지나면 잠잠해지겠지하며 기다리는데
잦아드는 기미가 없이 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고 집의 흔들림도 심해져갔다.

환태평양 조산대에 속해 있는 남가주..
1년에 서 너차례 정도, 강도(Richter scale) 3.5 - 4.5 정도의 지진이 와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데, 이번 지진은 겪어본 중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잠이 미처 덜 깬 상태에서 잠깐 머뭇거리는데
아랫층 부엌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쨍!"
"쨍그랑~~!!"
유리컵과 접시등이 떨어지며 깨어지는 듯 했다.
사태가 심각함을 느끼고 한시 빨리 집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옷을 갈아 입은 뒤 순이와 함께 큰애 방으로 뛰어갔다.

문을 제치고 불을 켠 뒤 애를 찾는데 침대 위가 텅비어 있었다.
"미정아!!"
놀라서 애를 부르니, 책상 밑에서 "네!"라는 대답과 함께 큰애(13살)가
얼굴을 내밀었다.
"빨리 집 밖으로 나가야겠다!"라며 그애의 손을 잡고 둘째와 셋째의 방으로
갔는데, 연이어 똑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가끔 학교에서 갖는 지진대비 훈련이 몸에 밴 듯
애들 모두 침착하게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 가
혹시 위에서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험에 대처하고 있는 거였다.

막내까지 챙기는 순간, 집의 흔들림이 멈춘 것이 느껴졌고
요란하던 부엌 쪽의 소음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30초 가량이었을까?

긴장감에 빨라진 맥박 소리가 귓속에서 여전히 들리는 듯 함을 느끼며
애들을 잠자리로 다시 보내고, 순이와 함께 부엌의 상황을 살피러 내려갔다.

어두운 복도의 불을 밝히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코를 찌르는 식초 냄새..
그리고 연이어 맡아지는 '부엌냄새'는 피해상황이 어떠리라는 것을 짐작케했다.

부엌의 불을 켜니, 눈앞에 펼쳐진 기막힌 광경...
깨진 유릿잔, 접시, 병, 그리고 흘러나온 내용물들...

아깝다~라는 생각도 잠시.. 우리 둘은 신발을 찾아 신고 조심스레 청소를
시작했다. 예상대로 1시간 쯤 후에 1/4정도로 약해진 여진이 와서
잠시 우리를 놀라게 하고, 묵묵히 2시간 여에 걸친 청소를 끝내고 나니
바깥이 훤하게 밝아왔다.

청소를 끝내고
이미 달아난 잠을 포기한 채 조금 일찍 출근하려 준비를 하는데,
창밖으로 옆집을 내려다 보던 순이가 불렀다.
"자기야! 이리 와서 저것 좀 봐!"
옆집 수영장의 물이 지진때문에 1/3 가량이 넘쳐 나가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상당히 흔들리긴 한 모양이군. 물이 저만큼이나 넘쳐 나갔으니..."라고 넘기는데
순이가 나의 팔을 꽉 잡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다른 데로 이사가자!"


일년내내 온화한 기후로 다른 지역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남가주..
큰 바람(hurricane, tornado), 홍수, 눈 문제마저 없어
정말로 살기 좋은 곳이기는 하나,
가끔 이렇게 찾아와 우리를 놀라게 하는 지진 덕분에,
세상살이가 불공평하지만은 않다라고 느낀다면 과장일까?

대자연 현상 앞에서
이렇게 우리의 초라함을 느낄 때마다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