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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


BY 이쁜꽃향 2003-03-29

"고모, 있잖아요..."

주방에서 열심히 설거지하는 저녁시간,
조카 녀석이 쭈볏거리며 조심스럽게 날 부른다.
으응 ~왜?
여전히 손놀림에 신경 쓰느라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건성으로 대꾸를 했다.
"만약에요,
고모랑 가족들이 모두 죽고 나면
나는 누구랑 살아요?"
녀석은 제법 심각한 듯 걱정이 잔뜩 배인 목소리로
뒷 말을 이어 갔다.
"할머니도 나 때문에 돌아가셨잖아요..."

아뿔싸!
하던 일을 멈추고 조카를 향해 돌아섰다.
그 아이의 눈동자 속에
그동안 혼자 얼마나 그 문제로 고민했었는가가
역력히 보인다.

세살 때부터인가
할머니와 둘이서 5년 가까이 사는 동안
할머니는 엄마이며 또한 아빠였으니
갑자기 맞이 한 할머니의 죽음이
저 아이에겐 어떤 모습으로 받아들여졌을까?
늘 함께 부대끼며
입 안의 혀처럼 모든 걸 챙겨 주시던 할머니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말았을 때
저 아이가 받은 충격은 어떠했을까?
친정 엄마 잃은 설움에 겨워
단 한 순간도 조카의 슬픔은 생각해 보지 못했다.
아니,
그 또래의 아이들은 '죽음'의 의미를
그다지 실감하지 못 할 거라고 지레 짐작해
그냥 지나쳐버렸다고나 할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밤중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통곡을 하던 둘째넘이
"엄마, 민이는 좋겠다.
아직 어려서 할머니 돌아가셨어도 슬픔이 뭔지 모를 테니까...
그러니까 장례식장에서
우리 할머니 돌아가셨대요 하며 다른 사람들한테
마치 자랑하듯이 떠들고 다니지..."
하며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가를
울어서 퉁퉁 부은 눈과
눈물 콧물 범벅된 얼굴로 보여 주었었다.
맞아, 조카녀석은 아직 절절한 애통함을 모를 나이지...
그렇게 지나치고 말았는데
뜬금없이 심각하게 자신의 앞 일을 걱정하는 조카 녀석의 말에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설명을 해 주어야만 했다.

민아,
고모가 할머니 나이가 되면
민이는 고모처럼 어른이 되어 있을 거야.
그리고 아빠는 고모보다 더 어리잖아,
그러니까 더 오래 살 거 아냐.
참, 광주 고모는 아빠보다도 더 어리지?
민이가 이 다음에 어른이 되고
장가 가서 아빠도 될텐데,
그 후로도 한참 있다가 고모가 할머니가 되면 죽을텐데
왜 너 혼자 살 거라고 생각하니?
그리고 고모네 형아들도 있잖아.
형아들이 민이랑 다 함께 살아줄 건데 그래도 걱정이 되?

녀석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비로소 미소를 지으며,
"아~하, 나보다 더 어린 종혁이도 있네~"하며
안심하는 눈치이다.
그래도 또 쓸 데 없는 고민 할까 봐 한 마디 더 했다.
고모는 건강하니까 더 오래 살거야.
우리 민이도 돌봐 줘야 하고
또 형아들도 더 키워 줘야 하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열심히 학교나 잘 다니는 거야, 알았쥐~?

평생을 조카녀석과 그 아비로 인해
마음 고생하셨던 엄마가 안쓰러워
할머니가 병 얻으신 건 모두가 너희 부자 때문이라고
입버릇처럼 미운 소릴 했던 게
조카 녀석 뇌리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할머니도 나 때문에 돌아가셨잖아요...'
자신이 평소에 할머니 말씀 안 듣고 속 썩였던 탓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됐다고 여기는 거 같다.
제 아비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아이가 죄책감을 갖고 있을 까 봐 한마디 덧붙였다.
할머니는 민이가 속 썩여서 돌아가신 게 아니라
나이가 많이 드시고 늙으셔서 돌아가셨단다...

나를 가장 무서워 하면서도
맨날 고모네 집에 가자고 졸랐다던 녀석.
언젠가
'넌 왜 고모네 집이 좋은 건데?'했더니
'부자여서요...' 웃으며 망서림 없이 대답하던 녀석.
부자?
빛 좋은 개살구인데 부자라...
너무나 어이없는 대답에 혼자 쿡 웃다가 한마디 했었다.
민아, 부자가 좋니?
네~,좋아요.
너도 부자로 살고 싶니?
네!! 당연하다는 듯 힘찬 대답.
앞으로 어른이 되서 부자가 되려면,
학생 때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단다.
그래야 이 담에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법을
알게 되는 거야.
그 뒤 우리집에 와서 며칠 살더니
냉장고를 뒤지다 한 마디 했더라지.
에~잉, 부자도 별 거 아니네~.

지지리 복쪼가리도 없으신 우리 엄마.
이제 그 망나니 아들 새 가정을 이뤄 새출발하려는데
몇 달 만이라도 견디시지
그 새를 못 기다리고 가시다니...
혼자 여러가지 상념에 잠겨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엄마 생각에 눈물이 핑 돈다.
둘째넘이 들어 온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서 있었더니
내 안색을 빤히 살피던 눈치 백단인 아들넘 하는 말,
"엄마, 오래 오래 사세요~"
내가 좀 피곤 해 하거나 속 상하거나 아픈 듯 하면
으레 나오는 둘째넘의 단골 레퍼토리.
대답 할 때까지 반복되는 요구에
마지 못해
'그~래' 하면 이어지는 다음 말,
" 나랑 꼭 같은 날 죽어야 해여~"
'이넘아,
엄마 나이가 너보다 훨씬 많은데
같이 죽으면 어떻게 되게??'
"그래도 엄마, 꼭 오래 살아야 되, 명령이야!!"
꼭 끌어 안는 녀석을 향해 마음 속으로 한마디 덧 붙인다.

그래, 난 오래 살아야 한다.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이 화창한 봄날,
나를 바라보며 사는 녀석들을 위해서라도
난 기운을 차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