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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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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물보다 진하다


BY 이쁜꽃향 2003-03-27

여동생과 나는 다섯살 터울이다.
엄마가 마흔 세살에야 낳으신 늦둥이.
노산이어선지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유난히도 병약했다.
늘 병치레가 잦으셨던 엄마는
'에~그,저 애 국민학교 입학하는 거나 보고 죽어야 할텐데...'
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런 엄마를 붙잡고 절대 죽지 말라고 울던,
오빠들과 언니 밑에서 있는지 없는지 티도 안 나게 자라던
작고 가냘픈 아이.

나 고3때 여동생은 중학생이었다.
야자수업을 하던 터라 저녁밥까지 도시락을 준비해 가야 했다.
부모님의 극성이셨는지
내가 요구했던 건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나는 늘 가족들에 의해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이 학교로 배달 되곤 했다.
때론 아버지에 의해
그리고 대부분은 여동생에 의해.
가난했던 우리 형편에 어찌 그리 했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다만 극진하신 부모님의 사랑으로만 기억될 뿐.

그러던 어느날,
저녁밥이 오질 않았다.
분명 여동생이 가져오기로 한 날이었는데...
식성이 아주 좋았던 나는 기다리다 지쳐 몹씨도 화가 났다.
집에 가기만 해 봐.
넌 혼 날 줄 알아.
코를 씩씩 불며 밤 늦게 귀가한 나는
화가 잔뜩 난 채로 방문을 벌컥 열었다.
단칸방에 살던 그 시절,
다락방이 내 방이었는데
여동생은 잠을 자고 있었다.
언니는 굶기고 네가 감히 편안하게 잠을 자?
일단 가방을 다락에 올려 놓고 내려 와
여동생을 깨우려는데
베개 옆의 일기장이 눈에 띄어 읽게 되었다.

오늘은 재수가 더럽게 없는 날이다.
복장 검사 결과가 안 좋다고
종아리를 맞고 단체 기합을 받았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정말 억울하다.
학교도 다니기 싫다.
언니 도시락을 갖다 줘야하는데 기합 받느라 늦어서 못 갔다.
호랑이 언니는 그 속도 모르고
학교에서 오면 내게 화를 몹씨 내겠지.
정말 죽어버리고 싶다.

그런 내용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다리를 볼 수 있게 이불 위로 얹은 채 자고 있었다.
가느다란 종아리에 매 자욱이 벌겋게 나란히 세 줄.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가만히 종아리를 만져 보았다.
퉁퉁 줄기 되어 부어 있다.
저 어린 것이 얼마나 아팠을까...
저도 속이 상했을텐데 언니한테 혼 날 걱정부터 했구나 생각하니
좀 전의 옹졸했던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러워졌다.

이젠 나나 그녀나 모두 사십대의 아줌마가 되었다.
어른이 되면서
나는 그 때 그 일을 이따금 떠 올리게 된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가슴졸였을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봐도 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 그녀에게 난 뭐든 해 주고 싶다.
마치 그 시절의 빚을 갚듯이...
결혼 비용부터 아이 출산 비용, 이사 비용, 아이들 옷...
아낌없이 해 주어도 늘 뭔가가 모자라는 것만 같다.
항상 내게 의지해야만 하고
어리다고만 여겼던 그녀가
엄마 가시고 마음 추스리지 못한 요즈음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때로는 마치 언니처럼 날 위로해 준다.

내가 미처 챙겨 드리지 못했던 부분을
내 대신 엄마께 해 드렸을 그녀가 한없이 고맙기만 하다.
바쁜 언니 대신 엄마 모시고 강가에 나들이도 가고
조카 학교 운동회 때 구경시켜 드리고...
너로 인해 그나마 우리 엄마가 외로움을 덜 느끼셨겠구나...
뭐든지 내 몫이다 여겼었는데
네가 대신 해 준 일들이 이제 와서 얼마나 고마운지...
날마다 엄마 생각에 울컥하여 혼자 울다가
그래도 성이 차지 않으면 수화기를 든다.
언니 체면에 먼저 울 수는 없어
울음을 꾹 참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냥 수다를 떨어보지만
끝내 목이 메이고 마는 나날들.

요즘은 너와 나를 자매로 낳아 주신 엄마가 어찌나 고마우신지...
그래,
네 말처럼 우리 서로의 엄마가 되자꾸나.
넌 내 엄마로
난 네 엄마로...
이 아침,
우리 엄마가 너무너무 보고 싶다.
그리고 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