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학교 문화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나의 부정적인 생각이 아이의 성장에 자칫 어두운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거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나의 변화는 학부모회 가입으로 시작되었다. 엄마의 학교 방문을 아이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나는 초등학교 때 한번도 학교를 찾지 않았던 걸 가슴 아프게 후회했다. 바보, 바보, 나는 왜 그리 바보 같은 엄마였을까. 유치원 3년 초등학교 6년 엄마의 잘못 때문에 아이는 주눅이 들어 살았던 것이다. 나는 과거의 나쁜 기억들을 헤치며 서서히 극성 엄마로 변신을 꾀하였다. 낯가림을 심하게 하는 내가 극성 엄마가 되는 데는 연습이 필요했다. 나는 학부모 모임에 빠지지 않았다.
중학교에는 같은 초등학교 출신들이 많았다. 우리 아이는 초등학교 때 반장, 부반장을 했던 아이들이 자기보다 우월하고 자기는 못났다는 열등감에 젖어 있었다. 세상 모든 어머니에겐 누구 아이보다 자기 아이가 잘나 보이기 마련이겠지만 우리 아이는 지적 사고력이 뛰어나고 감성이 풍부하고 재능이 많은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 이름을 날렸던 아이들말야. 너보다 못난 아이들이었어. 봐라 중학교에 올라와서 보니까 네가 공부를 제일 잘 하잖아. 아니야, 그 애는 반장을 하고 졸업식 때도 앞에 나가서 큰 상을 받았어. 아이는 결코 자신은 잘난 아이가 아니라며 거듭 엄마의 세뇌 교육을 부인했다. 내가 진작에 학교를 자주 찾아다니며 다른 어머니들과 정보를 교환하였더라면 우리 아이도 틀림없이 반장을 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며 학교 생활을 했을텐데 저리 주눅이 든 아이로 키워놓았으니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피아노뿐 아니라 여러 악기를 다룰 줄 알고 한번만 들어도 곡을 외울 줄 알고 노래 잘 부르고 아무리 복잡한 과학 조립품도 척척 만들어 낼 수 있고 그림 잘 그리는 아이를 너무도 평범한 익명의 아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지금에 와서 우리 아이는 말을 시작하는 나이에 벌써 스스로 한글을 깨쳤고 시계를 보면서 혼자 산수의 세계를 알아낸 꼬마 신동이었다고 자랑을 할 수도 없었다. 초등학교 친구들에게 우리 아이는 영원히 별 볼일 없는 아이로 기억될 수 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잘난 아이라고 알려진 아이 뒤에는 정말 열성적인 엄마들이 있었던 것이다.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 줄 아는 아이로 키우겠다던 나의 교육관은 흔들렸고 나는 자책감에 빠져버렸다. 한국 어머니들이 너무 설친다고 흉을 보았던 나는 그들보다 한 수 아래였던 것이다. 그들의 극성은 아이의 성공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들의 자랑이나 그 아이들의 긍지는 대단하였다. 저 엄마들이나 아이들이나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약간은 병적이야, 하면서 그들을 비난할 수만은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이미 배웠어야 할 발표력과 통솔력을 중학교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어차피 인간 세상에는 서열이 있고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있는 것을 왜 나는 우리 아이를 못난 아이로 만들어 버렸을까. 겸손했다가 낭패를 본 기분이었다.
아이가 너무나 소극적이고 말이 없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는 우선 아이에게 반장 선거 출마를 권했다. 내가 어떻게 반장을 해. 말도 안 돼. 아이는 영 자신이 없어 했는데 부반장에 당선이 되었다. 그러나 부반장은 아이의 성격을 고치는 데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학급에서 부반장이라는 존재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중3으로 올라 가면서 나는 다시 반장을 권하였다. 네가 변하기 위해서 너의 소극적인 성격을 바꾸기 위해서 필요하다. 반장이 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거야. 아이는 자기 반에 반장감이 몰렸다고 자신이 반장이 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했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누구는 타고 날 때부터 반장인가. 중 3씩이나 됐으니 아이들이 이제는 너처럼 잘난 척하지 않는 아이를 좋아할 거야. 네가 반장이 될 수 있어. 나는 아이를 부추겼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교실 뒤에 앉아서 만화만 그렸다던 아이. 선생님과 가까이 하지 않고 아이들 속에서 눈에 띄지 않고 묻혀 있던 아이. 그게 버릇이 되어 아이는 스스로를 말이 없고 소극적인 아이로 규정해버린 것이다.
중학교 때 사고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고등학교 생활이 어려울 거야. 올해는 공부는 접어두고 발표력과 자신감을 쌓는 것을 목표로 학교 생활을 하는 거다. 반장이 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야. 나는 거의 협박을 하다시피 하면서 과자를 많이 사서 책가방에 넣어 주었다. 아이들이 배고파할 때 이 과자 꺼내서 나누어 줘라. 안 그러면 너 같이 조용한 아이를 누가 봐 주겠니. 아이는 이건 정당한 게임이 아니라며 가져가지 않겠다고 펄쩍 뛰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로 이런 책략도 필요한 거야. 세상을 사는 지혜다,라고 생각해라.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네가 못 하겠으면 반에서 활달한 아이에게 주어 봐. 저절로 학급 아이들이 너를 보게 될테니까. 한번만 용기를 내 봐. 아이는 영 성에 차지않은 눈치였지만 엄마의 강요에 못 이겨 과자를 가지고 등교를 하였다.
우리 아이가 반장에 당선 되었다. 아이는 부정 선거였다고 찜찜해 했다. 바보, 부정이 아니라 꾀라니까. 하긴 우리 반 아이들 중에서 야, 내가 반장 되면 한턱 쏠게. 내가 반장 되면 게임 방 무료-하고 외친 아이들이 있었거든.나는 그런 말은 안 했으니까.
아이는 반장 일을 열심히 했고 선생님들에게 주목을 받으면서 변해갔다. 정말 반장이 되니까 시야가 넓어지고 두려움이 없어졌어, 하면서아이는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여러 대회에 출전을 하였다. 비록 초등학교 때 배울 걸 중 3때 하게 됐지만 활달한 아이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나 이제는 반장 되려고 과자 같은 걸 사서 뿌리는 그런 지저분한 짓은 안 할 거야. 하더니 반장이 되어 엄마에게 문자를 보낸 것이다.
우리 아이 때문에 반장에 떨어진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더구나 그 아이들 중에는 초등학교 때 삼 년이나 우리 아이와 같은 반을 하면서 반장을 했던 아이도 있다. 그 때는 무명의 아이, 익명의 아이였던 우리 아이가 반장이 되자 어리둥절해 하더라고 했다. 특활부도 같은 반이거든. 특활부 반장은 그 애한테 양보할까 봐. 아이는 그 아이에게 몹시 미안해 했다. 안 돼. 우리 나라 고등학교에서 양보는 안 돼. 입시와 연결되어 있으니까.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렇게 그악스런 엄마로 변모한 것을 우리 나라의 입시 제도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인간성은 이 다음에 대학에 들어가서 살리는 거야. 그 말을 하면서 나는 씁쓸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혼돈에 빠졌다. 이게 내가 잘 하고 있는 짓인지. 그러나 아이 키우면서 부정적인 생각은 금물. 되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적극적인 삶을 살자.----- 그러나 아무래도 뭔가 기분이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