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들 찾는 싸이트에 등록해놓고 두달 만에 처음 들어가보았더니 학교 다닐 때 같은 동아리에
있던 남자친구에게서 쪽지가 와 있었다. 조심스럽게 진짜 나인지를 묻는 두 줄의 쪽지였는데
그 두 줄에서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그의 말투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분 같은데... 맞다면 연락 주실래요? 아니라면 실례했습니다...
반가웠다. 내 머릿속은 하나 둘씩 가속도를 붙이며 떠오르는 그 친구에 대한 기억들로 분주해졌다.
수줍은 남자. 하루에 몇번을 마주쳐도 보일듯 말듯한 엷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던 친구.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1년이 다 지나도록 이름과 학과를 빼곤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을
정도로 말이 없는 아이였다.
그런 애가 어느 날 나한테 편지를 보내왔다. 천방지축으로 까불기만 하던 나를 그 애가 1년 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난 그에게 친구만 하자고 했고 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그 애의 선한 눈빛을 기억하고 있다. 그 애와 같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그 눈빛을
마주할 때면 편안해지곤 했다. 마음 속에 불덩어리를 품고 다니던 학창 시절 그 애는
휴식 같은 친구였다.
우울할 땐 술 사달라 조르고 기쁜 일이 있을 땐 깡총깡총 뛰면서 재잘거리고 속상할 땐
짜증내고 소리지르며 화풀이했는데 친구는 그저 조용히 머리만 긁적거릴 뿐이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 친구와 나의 관계는 처음부터 그 끝이 보이는 관계였다.
서로 두 개의 일방통행로를 달리고 있었으니까. 나는 친구에게 우정으로, 친구는 내게 애정으로.
마지막으로 친구는 나한테 자신이 즐겨듣던 클래식 기타 연주곡들을 편집해서 녹음한 테입을
선물하고는 군입대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기억의 조합은 여기까지.^^
연락을 할까말까 고민하다가 멜보내기 버튼을 클릭했다. 10년 전과는 달리 설레이기까지 했다.
반가운 마음을 몇자 적고 불현듯 나는 그 테입을 떠올렸다.
<네가 주었던 그 테입, 참 아름다운 곡들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고맙다는 말을 못했네...?>
지금 생각해보면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순수한 사랑의 추억을 갖게해주어서 참 고마웠다는 말을
나는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다음 날 답장이 왔다.
<너와 함께 했던 기억은 별로 없지만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다. 내가 너에게 테입을 준 적이 있었나?>
...
... ㅎㅎㅎ
사랑은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다지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또 모르겠다.
그 애와 내가 각자 편리대로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 새로운 조형물을 창조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는...
다만, 최소한,... 영원한 사랑이 없다는 것은 신이 내린 유일한 축복이다.
사랑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지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죽어서도 영원히, 매일 그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면...
또 가슴 속에 담아두어야 할 아픈 사랑이 고스란히 영원하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피곤하고 고단할 것인가...
사람도 사랑도 내 맘대로 완성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한 삶인데 한 사람만을 향해
영원해야 한다면 우린 또 얼마나 불행하고 황폐한 시간을 보내야 할까...
그래서 사랑이 없다는 건... 영원하지 않다는 건... 참, 다행이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