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시답지 않은 기억임에도, 꽤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사진 한장면이 있습니다.
동네 오빠들이 평상에 펴놓고 보던 무슨 주간지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선데이서울]같은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장면이란 것이 뭐였는고 하니......
어떤 영화를 찍고 나서 여배우들이 추위를 녹이기 위해 목욕탕에 들어갔던가 봅니다.
그런데 목욕탕 안의 뜨거운 욕조가 그리 크지 않으니, 주연급 여배우들은 뜨거운 탕안에 머리에 수건올리고 들어가 앉아있고, 엑스트라들은 그 주변에서 웅크리고 떨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탕안에 들어가 앉은 여배우는 뜨듯한 물에 몸을 녹이며, 느긋한 표정으로 탕 밖의 엑스트라들을 소 닭 쳐다보듯 바라보는 있는 그 장면.
그게 안 잊혀지고 지금까지 내 머리속에 남아있다는 겁니다.
수건같은 걸 대강 몸에 두르고 한껏 웅크린채 옹기종기 (다닥다닥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듯) 탕 밖에 모여앉아 있던 엑스트라 여배우들이 왜 그렇게 불쌍해보이던지요.
인생을 살다보면 항상 따뜻한 양지에 자리하는 사람과, 늘 볕도 안드는 음지에서 생색도 안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저 사람은 무슨 복에 저렇게 만사형통 잘만 풀려갈까...싶은 부러움을 느끼게 하는가하면, 또 어떤 이는 저런 인생살이에 무슨 낙이 있어 저 고단한 삶을 이어가나 싶은 척박함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꼭 양지바른 곳에서만 사는 것 같은 인생살이라도, 다 행복한 것은 또 아닌 것 같습니다.
저 궁상스럽고 구차스런 인생에 뭔 영광있으랴싶은 사람들도 의외로 자기 나름의 행복을 가꾸며 살아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니까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름이 "방대자"인 초등학교 친구가 있었어요.
이름도 이상하지만 외모는 더더욱 괴이하고, 여자면서도 덩치는 씨름선수만한 그런 아이였지요.
그런데 그아이의 심성은 말할 수 없이 곱고 착하기만 한거에요.
제가 어릴 때 몸이 약하다보니까 남자애들이 짖궂게 많이 놀려대곤 했는데, 그때마다 대자가 저를 보디가드해줬지요.
그애가 놀리는 남자애를 때려줘서가 아니라, 워낙 한 덩치하다보니까 남자애들이 지레 도망가버렸거든요.
그애는 부모도 없이 보육원에서 (그때는 고아원이라고 했답니다.)자라고 있었는데, 아버지라도 있는 네가 나는 너무 부럽다면서 몇번씩 힘주어 말하곤 했습니다.
언제나 집에 돌아가면 우울한 생각밖에 없던 나였지만, 그래도 대자와 함께 있으면 편하고 상대적으로 내가 조금은 더 행복한 것 같아 웬지 미안하고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그 아이는 초등학교만 마치고 말았기때문에 그 뒷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지요.
어느 날, 성인이 되어 남대문시장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노점에 옷을 수북히 쌓아놓고 파는 여자가 웬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어요.
자세히 보니 대자더군요. 너무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척을 했는데, 긴 이야기는 못했지만 너무 힘들게 산 것이 역력해보였답니다.
그런데도 의외로 그녀의 표정은 밝고 맑았어요.
예나 지금이나 인물은 영 시원찮았지만, 그녀의 너그럽고 온화한 미소는 사람을 너무나 편안하게 해주더군요.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어린 아이를 키우기위해 노점상을 한다고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지만, 동정하는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친구인데,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 어떨지 몰랐으니까요.
그녀의 마지막 말.
그래도 나밖에 모르다가 간 사람이었어.
그 사람 그렇게까지 살려고 아둥바둥했는데..... 이젠 내가 그 몫을 해야지. 그래도 나는 행복해.
집으로 돌아와 그녀를 생각하면서, 다시한번 그 욕탕속의 여인들을 떠올려봤었습니다.
필경 내 친구 대자는 사람들 잣대로 보면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기는 커녕, 주변에서도 한데쪽으로 비켜있는 엑스트라인생으로만 보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또 다르게 생각합니다.
비록 탕속에 몸 한번 담궈보지 못한 인생일지라도, 그녀의 들꽃같은 인생은 결코 시들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노라고.
먼저 간 남편에 대해 원망 한마디 없이, 그가 살아 생전 주고간 사랑만으로 힘을 얻어 살아가는 그녀를 어찌 엑스트라 인생이라고 폄하할 수 있겠습니까?
나 또한 그에 못지않게 언제나 행복이 비껴간, 그래서 한기까지 도는 탕밖을 서성이며 살아온 인생이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그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행복할 권리가 있음은 압니다.
하늘의 부름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나갈 그 날까지, 그래도 내게 주어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꿋꿋하게 살아내는 일.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주연이 할 수 있는 진정한 역할 아닐까요?
아무리 초라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자기 인생에서 엑스트라는 없습니다.
단지 주연만이 존재할 뿐이죠.
칵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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