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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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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김치


BY ooyyssa 2003-01-17


지난 가을, 부녀회를 통해 사들인 농협 고추가루 50근이 거의 바닥이 났다. 한번에 두근씩 4개월 동안 썼으니,4,5일에 한번씩 열다섯 포기의 김치를 스물 다섯번 담았다는 얘기다.
삼백 칠십포기가 넘는 김치를 내 손으로 담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오늘은 거의 서른 포기가 넘는 김치를 담았다.
매번 하는 일이라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진 않지만, 고무장갑에 잔뜩 고추가루가 묻혀져 있는데, "담배 주세요."하며 손님이 들어 오면
난감하다.

오늘은 평상시처럼 뱃사람들에게 한 봉지에 오천원씩 받고 팔려고 담은 것은 아니다.
배추 농사를 지은 친구가 김치 자주 담는 나에게 파란 트럭에 가득
싣고 와서 선물한 것이다. 요즘 눈이 많이 와서 배추 값이 점점 올라간다는데, 어렵게 농사 지은 친구에게 미안하고 고마워 하면서도
밭에서 일하던 흙 묻은 친구의 손에, '초록매실' 한병 밖에 건네지 못했다.

우리 집에 내려 주고 간 배추 오십여 포기 중, 몇포기는 이웃에
나눠 주고, 남은 삼십 포기 가량을 소금에 잘 절여 놨다.
김치를 자주 담그는 우리 집은 '김장'이라는 걸 따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은 공짜로 생긴 배추니까, 몇 포기는 따로 두고 겨울내 먹고,몇 포기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고추가루랑 양념 값은 해야 하니까 나머지만 팔아야지 생각했다.

김치통 하나 하나 채워 넣으며, 이름표를 붙이듯 사람들을
떠올리는데,
"아줌마, 저 오늘 가요." 하며 출입항 신고소에 근무하던 전경대원
하나가 들어와 인사하고 나갔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아침 일곱시면 어김없이, .
신고소 소장님과 대원 둘셋이 부두 전체를 돌아 다니며, 쓰레기를
줍고 비질을 한다. 아침 일찍 집 앞을 쓸어 놓지 않으면,
우리 집 앞도 쓸고 지나간다.
소장님부터 솔선수범 하는 분이라,그 밑의 대원들도 깍듯하고,
덕택에 마을 전체가 깨끗해졌다.
그런데 나는 신고소 개 '누렁이' 밥은 자주 주면서도, 신고소에 뭘 갖다줄 생각은 한번도 못했다.

따로 신고소에 가져갈 김치를 담아, 신고소 문을 두드렸다.
전경대원들이 내가 내미는 김치 그릇을 받으며,"고맙습니다."
합창한다.
내가 주고 왔는데, 내가 받은 듯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매일 매일 미안했는데, 김치 몇 포기 주고 오니 뿌듯하다.

이 얘기를 하자, 우리 시어머니는
"너도 부자로 살긴 글렀다. 공짜로 생긴 거 팔면 두배로 벌 수
있는데 그걸 동네 방네 나눠주니...."하며 웃는다.

내 생각에도 내가 돈 많은 부자가 될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배추 갖다 주는 친구도 있고, 김치 나눠 먹는 이웃도 있고
주거니 받거니 나누는 따뜻한 마음은 내가 가진 돈보다 훨씬 많으니
그다지 가난하지도 않다.

내일은 배추 준 친구에게 김치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