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다.
그 여동생을 내가 부를때는 시누라고 부른다.
나는 이 말이 어떨땐 내 인생의 굴래처럼 느껴진다.
남편을 무지 좋아하는 여동생.
조카들을 무지 좋아하는 고모.
그런데 난?
난 그녀가 아무에게도 힘들어서 말못할때만 찾는다.
그녀의 위안을 얻고자 할때 그리고 푸념을 하고 싶은데 할사람이 없을때.
그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나는 시누!'가 된다.
결혼 15년
어느정도 이러한 복잡한 관계에서도 정리될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 '시누'라는 단어에 고통받고 있다.
이제는 난 밥상을 차릴때 도와주지 않고, 상 치울때도 그냥 배부르다며 누워 있는 그녀를 편안한 마음으로 볼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이건 옛날에는 아무일도 아닌 일이었나 보다.
그때는 진짜 못봐줄일들이 많아서 이런 일들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는데 이젠 겨우 이런 일 가지고 화를내며 옛일까지 기억한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너그러워져야 하는데 그런 기대와는 다르게 울화증이 더 많이 난다.
아마도 말못하고 가슴속에 담아놓은 고통의 일들이 더 많아 자꾸만 쌓아놓는 까닭인가 보다.
그래서 할머니가 되면 아이가 되어 가는 걸까?
할일도 많지 않고 지난 세월 돌리켜보면 억울한 일이 많아서 푸념하고 서운해 하고.
나쁜 기억들을 먹는 괴물들이 있으면 좋겠다.
그녀와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려 보고 싶다.
그런데, 웃었던 기억도 많은데 행복하진 않았다.
그건 그녀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내게 '정'을 갖고 있다는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난 그녀에게 없으면 불편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귀하게 여기니까 어쩔수 없이 인정하는 것 이라는 아주 불편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 생활을 모방하려하고 내게 인정받으려 한다.
그녀는 날 경쟁상대로 여기는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날 버거워 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이제는 그녀를 내가 힘들어 한다.
그녀의 생각을 저 한쪽 귀퉁이에 몰아 넣어 놓고 싶다.
그래서 자물쇠로 꼭 꼭 채워 두고 싶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난 그렇게 할수가 없다.
그녀는 바로 내 눈앞에 항상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