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엔 편지를 쓰려구요. 에세이방 여러 벗님들께요.
시시하지만 즐거운 일들로 말이지요.
세상일 생각하기 나름이고,
어느 날 돌아보니 제가 꽤 낙천적인 사람이 되어 있더라구요.
수박
어젯밤 문화10년을 앞서간다는 국민일보 보급소를 하는 키작은 사나이가 수박을 한통 놓고 갔습니다. 처음엔 "뭐 이런 걸 사왔느냐"고 했다가 "형님이 컴퓨터도 고쳐 놓았는데 그냥 빈손으로 올수가 있나요" 했습니다. 그 사나이의 컴을 고쳐달라고 집안에 가져다 놓은게 벌써 보름이 넘었고 언젠가 한번 저녁 늦게 남편이 점검을 하는 걸 본 뒤론 고쳤는지 안고쳤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집도 좁은데 가져갈 생각도 않는다고 두어번 발로 걷어차기는 했어요.
"안고친거 같던데..." 말을 흘렸어도
"형님이 다 고쳤다고 가져가라길래 왔다"는 사람한테 덩그렇고 잘 생긴 수박까지
덤으로 가져온 사람한테 빈손으로 보내기도 뭐해서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다가
컴퓨터 본체를 넘겨주었습니다.
"문화 10년을 앞서가는 사람이여서 안목도 다르구나. 이 수박 잘 생긴거 봐라".
방을 닦다 말고 나는 비닐안에 들어 있는 수박을 이리저리 밀다가 비닐을 벗기고는
이내 비닐 안에 쓰레기들을 넣었습니다.
저만큼 굴러간 수박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는 딸에게 호된 소리를 한번 했지요.
"아무리 껍질을 까서 먹는다고 뭐하는 짓이냐"며요.
남편이 돌아와 딸이 재미삼아 굴리고 다니는 수박을 보고 왠거냐 물었습니다.
높은 지대에 살다보니 제가 여름날 수박을 사는 일은 꿈에 떡 얻어먹기 보다 더 힘든 일임을 잘 아는 사람이라 더 의아해했습니다.
수박의 출처를 알자 그는 곧 전화를 했습니다.
"야 이 바보야, 점검은 했지만 고치지도 않았는데 가져가면 어떻게 해..."
" ...아이고 너 바보 아녀"..
남편의 전화소리를 들으면 방을 닦다가 그 사나이가 다시 오면 딸이 궁뎅이로 문지른 저 수박을 다시 돌려줘야 하나 , 말아야 하나...
컴을 다시 가져오면 수박을 줘 보냈다가, 컴을 가지러 다시 올때 수박 가져오랄까 말까...
즐거운 상상을 했습니다. 마침내 남편은 그 사나이집으로 가서 부품을 끼워준다는 말로 전화 수화기를 놓길래 저는 뒤도 안돌아 보고 칼잽이를 했습니다.
칼을 대자 마자 수박은 붉은 혓바닥을 날름 거리고 있었길래
나는 그의 혓바닥을 잘라 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혓바닥은 달작지근하고 부드러웠지만, 뱃속에 들어가자 마자 못다한 말을 퍼내는지
어쩌는지 내 배가 금방 항아리만 해지고 말았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간혹 나에게도 그런 달작지근한 혓바닥이 서너개는 족히 넘을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단물이 나는 혓바닥은 금새 효력이 나긴 했지만 남아지는 건
그닥 없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 큰 아이들에게 너희들 자다 이불에 쉬하는 건 아니냐.
아예 거실에서 굴러자라.. 해놓고 입이 찢어져라 웃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말이 시시했는지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고얀놈들.
냉장고가 하도 커서 애초부터 넣을 생각도 못한 수박이라,
절반은 잘라 그 자리에서 요절을 냈지만, 궁리중
반의반은 조각내 작은 통에 넣어 냉동고에 보관(아이들 아이스크림용)
나머지 반의 반은 더 이상 처리를 못하다가
양푼에 담아 씽크대 위에서 나체로 보관중, 새벽녘 일어나 산밭엘 다녀온 뒤
몸안에 붙은 흙을 털어내고 머리를 감은 다음 숟가락을 들고와 퍼 먹으면 편지를 씁니다.
목도 말랐고 배도 고파서 숟가락으로 퍼 먹기 시작한 수박의 빨간 혓바닥은 금방 바닥이 나고 마는군요. 숟가락으로 긁다가 이내 흰 속살까지 말끔하게 먹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산밭이요?
해바라기는 꽃이 피려고 머물고 있었어요. 해바라기는 무리지어
자라고 있으니 한 스무그루는 될거네요. 옥수수는 수염이 나기 시작했구요.도라지꽃은 수도없이 많이 피었지만 큰 키 덕분에 그리고 드문드문 심어져 있었길래 다 넘어져 있더군요.도라지 꽃이 넘어진 자리에서 잘 자란 부추를 한 바구니 잘라 왔습니다.부추를 자를땐 바로 가서 겉절이 해 밥 비벼먹어야지 했다가. 아니다 전을 부쳐 먹어야지 했는데, 밭에서 돌아온 뒤 씻고 수박을 먹고 허기가 면해지니 싱싱한 부추를 바라보는 눈이 금새 게을러지고 맙니다.
이제 산밭은 풍성해졌어요.
제 마음이 가뭄이여서 그렇지.
마침내 제게 금주령이 떨어졌습니다.
술보도 아니고 중독자도 아닌데.
입이 술을 먹기보담 말이 앞서 술을 먹었는데.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고 읊조리길 좋아했는데...
일요일 즐겁게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