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오늘처럼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내려앉은 몹시도 흐린 날씨였었다. 가라앉은 마음과 어울리지 않게 순간 들뜬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거실 한 가운데서 나를 찾아 부르고 있었다. "수린아..어떻하니.. " 아랫층에 사는 준호엄마다 "왜그래.. 무슨일이야?" "13층 민희아빠가.." "응.. 민희아빠가 왜?" "어제.. 사고가.. 났는데.." "사고?..그런데?" "...돌..아..가셨데..." 3년 전이었다. 한 아파트에서 서로가 친하게 지내던 우리.. 우린 늘 시장도 함께 다녔고, 마음 맞으면 밤에 분위기 좋은 카페에도 찾아가 함께 차를 마시며 그렇게 친구같이 지내던 엄마들이었다. 민희엄마는 딸 쌍둥이 엄마였다. 7살이었던 쌍둥이 딸들은 엄마를 닮아 얼굴도 참 예뻤고 성격도 무척 활달했다. 그 엄마들은 나를 처음 보았을 때, 말 붙이기도 어렵고 쌀쌀맞아 보였다는 말을 하면서 사귀고 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두 엄마들은 너무나도 활동적이었고 매사 표현도 솔직 대담하여 내심 날 놀라게도 했지만 그들의 만남은 언제나 즐거웠고 부담이 없어서 좋았다. 우리 셋은 어느덧 친한 사이가 되어 하루하루 서로의 집에서 차도 마시고, 때론 밥도 함께 먹으며 그렇게 허물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준호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에서 들은 그 소식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표현하면 딱 맞으리라... 매일 만나서 남편 욕과 자랑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들.. 가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면 인사도 나누곤 했던 그분.. 그런데 그분이 교통사고로 그만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한다. 한 순간에 전해들은 그 소식에 난 너무 놀라 할말을 잃고 잠시 그렇게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집으로 돌아 오는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던 중, 깜빡이는 노란 신호등에 갖은 속력을 다 내어 직진하던 시내버스와 그만 그 자리에서 부딪혀, 나이 사십도 안된 열적적인 삶에 짧은 마침표 하나를 그렇게 허락도 없이 무심하게 혼자 찍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남편의 사고소식을 전해 들은 민희엄마는 울면서 바삐 뛰어 나가는걸 보고 뒤늦게 사연을 알게 된 준호엄마가 내게 그렇게 급히 전화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난 한동안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순간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오가며 밝은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던 쌍둥이 아빠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죽음이라는게 무슨 군입대 하는거 마냥 이렇게 일방통보만 받으면 끝인가.. 아니지..군입대는 연기라도 하지....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 난 이렇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피부 가까히 느껴보지 못 했었다. 우리가 그렇게 병원 영안실에 찾아 갔을때 그녀는, 몇차례의 기절끝에 병실에 누워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고.. 우리가 그녀의 집을 찾아 갔을 때.. 그 엄마의 흰피부는 더욱 더 창백해 보였고, 마침 빨래를 널고 있는 그녀는 문득 빨래감 속에 섞인 남편의 속옷이 보이자 긴 한숨 소리와 함께 내 뱉은 말.. "나쁜 놈!" 우리 셋은 식탁에 아무 말없이 잠시 앉아 있었다. 그리곤 그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나... 벌 받았나봐..." 그녀는 사고 나기 전에 세째 아이를 임신하였었다. 딸 쌍둥이를 갖은 그녀로선 아들을 원했던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데 5개월쯤 병원에서 확인한 바에 이르면 또 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내게 세째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물어 왔었다. 나는 바로 그녀가 그렇게 우려했던 딸만 셋을 둔 엄마였기에... 그러던 그녀가...어느 날.. 뭐가 그리도 싫었던지 그만.. 해서는 안될.. 중절수술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그래서....그녀는.. 마치 남편의 죽음이 자기의 그런 씻을 수 없는 죄의 댓가로 생각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슬픈표정으로 마치 고해성사하듯, 우리에게 아니 어쩌면 자기 스스로에게 그렇게 이야기 하는듯 해 보였다. 얼마 후.. 그녀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고, 나도 몇 년 전에 이 곳으로 이사를 오면서 우린 서로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잠재우고 지내던 중.. 어젯밤 퇴근 무렵에 걸려온 남편의 전화 한통으로 난 문득 그동안 잊고 지냈던 그녀가 순간 떠 올랐다. "난데..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왜?" "응..아는 사람이.. 어젯밤.. 교통사고로 ....." 남편은 어제 그 사람과 만나 두어시간 동안 서로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 한다. 그런데 오늘 뜻밖의 그 사람의 비보를 전해듣게 되었으니.. 하루밤 사이에 삶과 죽음으로 만나야 되는 그런 묘한 인연은 참으로 말로는 표현키 어려운 아픔이리라.. "아니 어떻게 사고가 났길래.." "응..예전에 그 쌍둥이 엄마네 사고하고 비슷해..." 그분 역시도 노란 신호중에 속력을 낸 자동차에 그만.. 남편의 전화를 힘없이 끊으며 잠시 잊고 지냈던 그 엄마가 문득 보고 싶어졌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쌍둥이 딸들도.. 많이 컸겠지..` 난 멀리있는 그녀에게 혼자 그렇게 이야길 하고 있었다. `민희 엄마야.. 너무 슬퍼하지마.. 슬픔도 너무 자주 하다보면 습관이 되거든..세월이 약이라잖아..` "다이어트가 저절로 되네.." 언젠가 많이 여위워진 그녀가 허탈하게 웃으며 한 말이다. 우리들을 만나면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즐거웠었던 순간들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는 그 말에.. 우린 그만 우리의 만남으로해서 그녀의 마음이 더 힘들어 질까봐 그렇게 서서히 멀어져 갔고, 어느새 우린 마치 약속이나 한듯히 자연스럽게 그렇게 서로를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 뒤로 난 가끔 .. 길을 가다가..차를 타다가.. 노란 신호등을 보면 그 엄마 생각이 났고, 그러면서 문득 빨간 신호등 보다는 노란 신호등이 더 섬뜩하게 느껴지곤 하였다. 오래 머물지 않고 잠시 깜빡이다 사라지는 노란 신호등..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윙크하듯.. 유혹하듯.. 신호를 보내는 노란 신호등.. 그렇게 어제도 오늘도..그리고 내일도 노란 신호등은 계속 쉬지않고 흔들리듯 손짓하겠지.. 쉬지않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차들처럼.. 모든 운전자들이 흔들리는 노란 신호등의 유혹을.. 좀더 여유롭게 바라만 보았더라면.. 좀더 너그럽게 바라만 보았더라면... 지금 이 세상에선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에서 함께.. 행복한 모습으로... 오래..오래... 살고.. 있었을텐데.... 오늘 이 순간에도.. 노란 신호등의 유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