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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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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뜰


BY 심향 2001-06-15

푸른빛 도는 낡은 양철대문이였던가
늘 반쯤은 입을 벌린채 측백나무 틈새에 끼여 너는 비스듬히 서 있었지.
생각해보니 네 기능은 이미 오래전에 상실했던것 같다.
닫힌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 적은 한번도 없었으니까.
비틀거리며 간신히 마당에 들어선 환한 대낮.
햇살에 하얗게 바랜 텅빈 마당은 은빛으로 출렁거렸지.
가볍게 휘청거리는 작은 그림자 밟고
저마다 빙빙 돌아가는 꽃들의 난무를 어지럽게 바라보았다.
아! 아버지의 손길이 한없이 머무는 곳
아버지는 틈틈히 꽃밭을 일궈 놓았다.
가끔씩 자잘한 씨앗과 틈실한 알뿌리를 시멘트봉지에 담아 오셨다.
잊을만 하면 또 다시 구해오는 씨앗들.
웅크리고 앉아 거친 손을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야 아버지의 따스한 마음을 조금씩 읽어낼수 있을것 같다.
철마다 다르게 내 기억의 창에 가득 핀 수많은 꽃들
울밖으로 우뚝 자란 자목련은 그때는 희귀종이였지.
구석진 곳에서 타오르는 불처럼 훨훨 피던 신비롭던 꽃
고향집을 떠날때 자목련도 함께 그곳을 뜨고 말았다.
웃자란 칸나의 핏빛 열정은 폭염속에서 자못 비감하기까지 했고.
백합의 진한 향내가 이맘때쯤이면 마당 가득 몽롱하게 서려 있곤 했지.
담장 너머 온통 넝쿨장미가 판을 치는 요즈음
고향집 뜰에는 연분홍빛 장미가 꼿꼿하게 피어났다.
질세라 밥공기 만하게 피어나는 소담한 다알리아 밑에서 수줍게 피어나는 형형색색 붓꽃들.
땅바닥을 기어가는 예쁜 채송화와 울밑에 핀 봉숭아는 닭벼슬 같던 맨드라미와 사이좋게 어깨동무 했지.
그리고 함초롬이 피다 때가 되면 스르르 떨어지고 마는 잊혀진 꽃잎파리들.
넓은 마당 반쯤을 차지만 꽃밭엔 과일나무도 있었다.
뒷간으로 가는 쪽문은 양철 대문과 다르게 늘 닫혀있곤 했다.
열린틈으로 보이는 봉분이 허물어지는 무덤 한기
낮이면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어 얼마든지 기대고 뒹굴어도
집안에서 보이는 작은 무덤이 웬지 무서워 나는 문을 꼭꼭 닫곤 했다.
쪽문 곁에 아버지가 간이로 만든 신식 세면대
땀에 흠뻑 젖은 여름날 꼬질꼬질한 얼굴을 닦다가 문득
고개를 쳐들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자줏빛 포도송이들
그것을 아마 한송이 뭉턱 따 먹었던가.
아니! 기억이 나질 않는다.
까치발을 하고 간신히 따낸 몇알의 포도 알갱이만
세수하다 말고 입속으로 쏙 집어 넣던 달콤했던 맛이 되살아날 뿐이다.
봄날에 앵두나무마저 세면대 곁에서 온통 분홍색깔로 뒤범벅 될때
나는 짐작을 했지.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빨갛게 달릴 앵두는 얼마든지 출출한 뱃속을 채워주리라는 걸.
그런날이면 옆집에 사는 복순이를 데려다 앵두만큼은 얼마든지 따 먹으라 했지.
군침이 도는구나. 그리고...
갑자기 목이 탄다.
시원한 우물물이라도 한 바가지 퍼마시면 갈증을 삭힐수 있을까.
두레우물이라면 혹시 모르겠다.
닭장옆 후미진 곳에 자리잡은 두레우물은 윗동네 공동샘이였지.
까만 동공이 끝없는 깊이로 묻혀 있는 곳
거리낄것 없던 개구장이 꼬마도 그곳에선 주춤거렸지.
갑자기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나를 본다.
그속으로 폴폴 빨려들것 같은 동심
그래서 아무도 없을때 가까이 다가서길 꺼려했었지.
물긷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한담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보리쌀을 박박 닦고, 푸성귀를 씻고 동이에 물을 가득 담는다.
희미해진 꿈처럼 닳아 빠진 고무 두레박을 건네준다.
흘러넘치는 맑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지.
냉장고에 들어 있는 어느 음료보다 더 차갑고 달게 마셔댔던것 같다.
생각만으로도 차 오르는 갈증을 해소할수 있을까.
또다시 잠잠해지는 우물가.
동이에 밤새 쓸 물을 이어 나르는 가난한 이웃들
그래서 아버지는 양철대문에 빗장을 달지 않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