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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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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진실


BY dlsdus60 2001-06-14

유년 시절, 엄마는 읍내에 5일장이 열릴 때마다 새벽밥을 드시고 집을 나서면서 늘 내게
하신 말씀이 있었다.

"낫 가지고 놀지 말고 장독대에 올라가지 말아라. 그리고 쓸데없이 애들이랑 돌아다니지
말고 방 어지럽히지도 말아라."

나는 엄마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알았다며 큰소리를 쳤고 엄마는 불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 집을 나섰다.
그런 엄마의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동네 아이들과 골목길을 누볐고 남의 밭에서
자라고 있는 오이도 따먹고 둥글게 여물어 가는 호박에 칼집을 내기도 하였다.
엄마가 돌아오기 전까지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서 엄마가 주의를 준 사항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놀았다.
평소에 어른이 있으면 엄두도 못 낼 버릇들을 잠재우지 못하고 나는 텅 비어 있는 집안
이곳저곳을 뒤지는 것이 너무나 신이 났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오후가 되면 나는 아무런 말썽도 피우지 않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얌전히 마루에 앉아 엄마가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시간을 보냈다.
기다림이 길어질 때마다 나는 내가 너무 빨리 마루에 와 앉아 있나 싶어 마당에 내려와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모이를 먹는 암탉을 쫓기도 하였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텃밭의 울타리를 붙들고 늘어질 즘에 엄마는 짐이 가득한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마당을 들어섰다.
엄마는 울타리가 무너지면 큰일 난다며 야단을 쳤고 칭찬을 들을 것 같았던 착한 아이의
일시적인 행동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엄마가 힘겹게 머리에 이고 온 보자기를 마루에 내려놓고 부엌으로 가기가 무섭게 나는
그 보자기를 풀어 헤쳤다.
내가 좋아하는 과자나 사탕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였다.
하지만 그 기대는 생각보다 빨리 무너져 내렸다.
보자기 속에는 마른 미역과 생선 등 그리고 그냥은 먹지도 못할 것들 뿐이었다.
엄마가 미웠고 괜스레 짜증스러웠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장에 가면 먹을 것도 많이 사다 준다는데 엄마는 그 흔한 사탕
하나 사 오질 않으셨다.
엄마는 먹을 것도 없는데 뭐하러 보자기를 풀었냐며 꾸중을 하셨고 나는 화가 치밀어
저녁밥도 걸렀다.
투정을 부리는 내가 미웠는지 엄마는 밥 먹기 싫으면 먹지 말라며 식구들이 저녁을 다 먹고
난 후에 상을 치워 버렸다.
배고픔을 참으며 오기를 부렸지만 후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엄마는 부엌에서 조상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고 나는 고소한 냄새에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어슬렁거렸다.
엄마는 그 음식에도 제사를 모시기 전에는 내게 손도 못 대게 하실 게 분명했다.
그것은 여러 번의 경험에서 터득한 것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찬밥을 먹다 남은 국물에 말아먹고 잠이 들었다.
새벽이 되자 조상의 제사상은 생각보다 푸짐했으며 모두 엄마가 잠을 설치며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들이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당숙들의 재배가 끝나고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를 기다리는데
닭은 새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무지 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한참을 기다리자 잠에서 덜 깬 듯한 수탉이 목청을 높이자 조상의 영혼은
황급히 집을 떠났다.
얼마나 고대하며 기다렸던 시간 이였던가.
제사상에 음식들은 너무나 맛이 있었고 평소에 먹어 보지도 못한 음식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생선과 각종 전들 그리고 넓적하게 자른 불고기와 과일들이 나를 너무
행복하게 만들었다.
과자가 없었던 보자기에는 과자 보다 몇 배나 맛있는 것들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엄마에게 투정을 부렸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렇듯 기다림은 삶의 맛을 달게 하고 삶을 윤기 있게 하며 지금보다 더 좋은 것들로
채워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