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기한테 할 말이 있어."
"뭔데?"
저녁식사를 끝내고 신문을 읽고있던 나에게
아내가 심각하게 말문을 열었다.
고교동창, 대학동창들이 첫째, 둘째들을 낳았는데,
자기는 너무 뒤쳐지는 것 같다고...
"왜? 누가 뭐라 해??"
"아니! 그냥 내 생각이야."
결혼한 지 2년이 되도록 2세 소식이 없자, 은근히 걱정하시는 어머니께,
'아직 친구들이 모두 총각인데 내가 애 아빠 된다는 게 싫어요!'라며
넘기곤했는데, 순이의 말을 듣고보니,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직 어른이 됐다는 느낌이 없는데, 애 아빠가 된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그래! 이왕 가질 아이, 조금 일찍 시작하는 것도 괜찮겠지.'
그날부터 피임을 중지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
(조금 '야'할수 있는 부분은 그냥 넘어갑니다. 후후)
넉달만에,
화장실에서 임신테스트를 마치고 환하게 웃으며 나오는 순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순이에게 '공주님의 옷'이 입혀졌다.
태교에 좋다고 좋아하는 음악, 싫컷 듣고...
먹고싶은 음식, 맘껏 먹고...
힘든 일은 될 수 있는대로 피하고...
나도,
평소에 싫어하던 쇼핑도 군말없이 따라다니고...
미국남자들 다 한다고, 라마스 박사의 호흡법(진통 시 고통을 줄이기 위한)
강의도 같이 듣고...
산후조리 때 필요하다고,
설겆이 연습, 미역국 끓이기, 등등.....
그렇게 바삐 지내기를 몇달...
어느날 저녁, 같은 동네에 살고있던 고교동창 녀석과 셋이서
'고스톱'을 치고 있는데, 순이가 갑자기 내 팔을 꽉 잡았다.
"왜? 애, 나와??"
"응! 그런 거 같애!"
예정일을 벌써 일주째 넘기고있던 때라,
부리나케 준비해둔 가방을 집어들고 병원으로 달렸다.
그러나, 섭섭하게도 간호사는 '가 진통'이었다고 우리를 돌려보냈고,
그 다음날 얘기를 들은 친구는,
"야~~ 막 '고도리'하려던 참이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지금도 그 친구는 그랬었다고 우깁니다.)
이틀 후, 다시 찾아간 병원에서 곧 아기가 나올거라는 말을 듣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담당의사가 나를 좀 보자 했다.
'무슨 일인가?' 걱정스러워하는 나에게
"분만실에 들어갈거냐?"고 의사가 물었다.
'라마스 박사 호흡법' 강의 때,
같이 배우던 남자들 모두 분만실에 들어갈거라 해,
나도 당연히 들어갈 생각을 하고,
손도 소독하고 '가운'도 입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자기 아이가 이 세상에 처음 나오는 순간'을 보고싶어하는 아빠들이
많이 있지만, 자기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막고 싶다고 했다.
아빠가 정신적 쇼크를 받는 경우가 제법 있다고.
조금 혼란스러웠다.
'미국 남자들은 모두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자랑스럽게 남들에게 보여주는 사람들, 많음)
순이에게 물어보니,
안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다면, 궂이 내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했다.
속으로는 싫었지만, 남들 다 하는 줄 알고 참으려 했다고...
대기실에서 15시간...
분만실에서 2시간.....
그 긴 고통 끝에, 분만실 안에서 "응애~~"하는 애기울음이 들렸을 때,
나도 모르게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그 때 태어난 딸이,
올해 대학을 졸업해서, 갈 길 찾아 잘 가고있는 걸 보면,
'세월이 유수 같다'라는 말이
절로 입에 맺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