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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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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43


BY 후리지아 2002-08-02

몇 일을 폭염이 기승을 부리더니, 오늘은 바람이 시원합니다.
그렇다고 가을을 이야기 하기엔 이른 것 같지만 그래도 가을이였으면 좋겠습니다.
어제와는 다른 바람 이였으니 내일은 오늘과 또 다른 바람으로 우리를 찾을 것 이란
생각으로 조금 더운 것은 참을 수 있다고 최면을 겁니다.
그래야 남아 있는 여름을 잘 날 수 있을 것 만 같아서 입니다.

오늘은 감사 한 마음과 아리게 아픈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작은 녀석이 몇 일째 몸살을 앓고 있어 출근을 할 수가 없었지요.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목사님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늘 함께 다니던 아이가 보이지 않으니 궁금 하셨던 모양이십니다.
"oo인 청년부 수련회 갔지요?" "아니요, 좀 아파요."
"혈소판 때문인가?" "성경학교 마치고 몸살이 좀 난 것 같애요."
인사를 하고 현관을 나서는데 장로님 한분이 서 계시다가
"아이구 그래 아이들이랑 어떻게 사세요?"
전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어 웃으며 목례를 하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늘 하던대로 라디오를 켜고, 한 숨 잘 요량으로 침대에 눕습니다.
쉽게 잠이 들지 않아, 뒤척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립니다.
제 집엔 좀체로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전화벨이 울릴 일이 없는데
몇 일째 꿈자리도 좋지 않고 마음도 우울한 터라 혹시 연로 하신 시어머님께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송수화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이요, oo인 엄마 출근 하면 혼자 있나, 혼자 있으면 밥도 먹지 않을테고
병원은 다녀왔고, 지금은 어때?" "네 약 먹고 괜찮아 졌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목사님!" "아침 먹여서 10시쯤 교회로 보내요."
인사를 드릴 겨를 도 없이 전화를 끊으십니다.

아이를 깨워 교회엘 보내고, 일상을 시작합니다.
시간이 두시간이 넘었는데 아이가 돌아 오질 않습니다.
아픈 아이에게 기도를 해 주시려나 보다 생각을 하며 보냈는데
연락도 없이 아픈 아이가 들어오지 않으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교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사무원이 전화를 받고, 저인 것을 확인 한 다음 아이가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있다고 이야길 합니다.
전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말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셨구나. 아픈 아이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이 어미를 대신해
병원을 데리고 가셨구나. 죄송한 마음에 인사도 못드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가슴이 아려오기 시작했지요. 늘 받기만 하는 제 가정이 언제쯤 목사님의
근심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제 자신의 무능력함을 야단치고 싶은 시간 이였습니다.

감사하고 아픈 마음을 추스리기도 전에 또 한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오빠다, 별 일 없니?" "예 별 일 없어요, 오빠는요."
"응 오빠도 잘 있다, 명수 오빠가 하늘엘 갔구나."
"네! 어느 병원이예요?"
저희 남매는 이렇게 무심한 대화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돌아 가신 오빠는 제 친 오빠는 아니십니다. 전화를 하신 다섯째 오빠의
친구시지요. 제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사업적으로나 물질 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오빠셨습니다. 10여년 전에 혈액암 선고를 받으시고 오랜 투병 생활를 하셨지요.
중간에 호전이 되시어서, 딸을 셋 낳으시고 꼭 아들이 있어야 한다면서
늦게 아들을 낳으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호전 되었으니 완치가 되셨나 보다
생각을 했었지요.
제 남편보다 먼저 암 선고를 받으신 오빠께서는 남편의 암 선고 소식을 들이시고
마음아파 하시며 이것 저것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수술을 받고 퇴원을 했을 때, 암에 좋다는 상황버섯이며 타이보 차 를 구해
오시기도 하시고, 수술 후 지켜야 할 사항 들을 의사들 보다 더 꼼꼼히 챙기셨지요.

남편이 중환자실에서 코마 상태로 누워 있을 때도 하루도 거르지 않으시고
찾아 다니셨습니다. 오빠들을 잡고, "최 서방 살려야 하는데 살려야 하는데..."
를 되뇌이시며 다니셨지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가슴 아파 몇 날을 우시기만 하셨는데, 이제
그 오빠가 남편을 만나러 하늘로 가셨습니다.
그 오빠께서는 같은 병으로 같은 고통을 경험 하셨기에 더 절절한 가슴 이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 했습니다.

링거를 맞고 돌아 온 아이를 데리고 영안실로 갔습니다.

6년전 제가 서있던 자리에 언니가 서 계셨고, 제 아이들이 서있던 자리에
오빠의 아이들이 올망 졸망 앉아 있습니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겪어보니 아무런 말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영정을 향해 기도를 하고 언니의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아
주었습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전 다 알 수 있었으니까요.
"오빠가 너무 고통스러워 하니까 빨리 가라고 했어, 못 보겠더라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아이들 생각하면 잡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
언니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무슨 말인가를 계속 하는데 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언니는 얼마나 큰 절망의 다리를 건너시고 계실까(?)
"있지! 내가 용진이 임신 했을 때 밥도 먹지 못하고 힘들어 하니까 최서방이
전화를 해서 형수 뭐 먹고 싶어요. 하더라구, 생선 초밥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금방 생선초밥을 사서 달려 왔더라구, 나 그거 잊을 수가 없어."
언니는 먼저 간 제 남편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그래요 언니, 이제 천국에서 둘이 만나 재밌겠네."

돌아서 나오는 길에, 아이들 얼굴이 눈 앞을 가려 쉽게 발길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난, 둘인데도 힘들어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는데, 언니는 넷이나 어떻게 키워요.
고3의 큰 딸이이를 시작으로 중2, 초등4학년, 막내인 아들이 여섯 살이니...
드문드문 낳지 말고 간격이나 좁혀서 낳으시지...
이렇게 허무하게 갈 것을 그 아들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늦은 나이에 낳아
자라는 것 보지도 못하고 가신담...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아이와 전 아무 말 없이 지하철 역 까지 걸었습니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파랗게 펼쳐진 하늘이 보였지요. 군데,군데 흰 구름이
물감을 뿌려 놓은 듯 아름다운 하늘 이였습니다.
그 하늘을 올려다 보며 전 빌었습니다.
이 이후 에는 정말 마음 아프고 가슴 아픈 일을 주시지 말라고, 아주 조금만
정말 조금만 아무 일 없이 살고 싶다고 빌었습니다.

전 오늘도 산다는 것의 결론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살아 있어 감사한 마음은 잃어 버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산다는 것은...
아프고 힘들어도 혼자 겪는 것이 아니라 곁에서 지켜주고 보듬어 주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어 살 수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