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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움과 깨끗함


BY my꽃뜨락 2001-05-23



남편이 아주 아끼고 좋아하는 후배가 있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다 귀국해 몇년째 고향에서 살고 있는데, 처
음 보는 사람도 저 사람 경제계에 종사하는 사람이겠
다싶게 인상이 야무지다.

그래서 혹자는 샤일록 같은 느낌을 준다고 혹평을 하
기도 했고, 또 다른 이는 합리적인 자본주의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나또한 그이를 보면 또록또록한 눈
망울이 어찌나 강렬한지 좌르륵 지폐 넘어가는 계수기
가 상상되는, 천상 장사꾼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곤
했다.

매사에 빈틈 없고, 찔러도 진물 한방울 안나오게 생
긴 그에게 개인적으로 결정적인 위기가 닥쳐온 사건
이 일어났다. 드센 남편 밑에 가리워 늘상 조용하고
어두운 낯빛을 하고 살았던 그 부인에게 사랑하는 남
자가 생긴 것이었다.

우연히 부인 일기장을 보고 사태를 파악한 후배는
그 남자와 자기 부인을 아주 주리를 틀어버린 것 같
았다. 이혼을 애원하고 있다는 그 부인의 소식을 나
는 그녀와 가까운 선배에게서 얻어 들었다.

나는 그 후배가 겪고 있을 상처가 너무 안타까워 남
편에게 그 소식을 전해 주었다. 만나면 따뜻하게 감
싸주라고. 그랬더니 이 아저씨가 사단을 내버렸다.

어느 모임에서 만나 술을 진탕 마시고, 술김에 그 후
배에게 일갈을 해버린 것이었다. 이 놈아, 너 마음고
생 그만하고 그 여자하고 이혼해 버려라. 그리고 새
출발하라고 불문곡직 호령했다는 것이다.

치부라 생각하고 모두에게 숨겨왔던 그 후배는 몹시
당황했던지, 술취한 남편을 부축해 당장 내게로 왔다.
누가 머리 팽팽 돌아가는 사업가 아니랄까봐 자리에
앉자마자 내게 추궁을 했다. 형수, 그 소문 어디서 들
으셨소? 우리 부부 아무 문제 없는데 형이 나보고 당
장 이혼하라고 안하요?

참말로 뒷골이 땡겼다. 우선 이 소식을 전해준 그녀
의 선배를 생각해서라도 아는 척 할 수가 없었다. 나
는 막무가내 오리발을 내밀었다. 나는 모르는 일인데?
그 집 부부사이가 어쩐지 내가 어찌 알겠어? 다만 사
업이 어려워 마음고생한다고만 걱정했었는데...

믿거나 말거나 우선 뻗대고 봐야겠기에 아예 두 말 못
하게 못을 박고 나서 남편을 몰아세웠다. 어디 가서
무슨 말을 듣고와 헛소리를 하냐고. 또 얘기 전할려면
똑바로 전해야지 왜 나는 끌고 들어가냐고 화를 펄펄
냈더니 두 남자 얼이 빠져 아무 말도 못했다.

남편에게 계속 화가 났다.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심정이라면, 아무리 안타까
워도 모른 척 해주는 것이 예의 아니던가? 무슨 남자
가 저리도 입이 싼지...

하여튼 남편의 취중발언이 계기가 되어 그 후배는 자
기 가정사를 몇몇 가까운 지인들에게 공개를 했다. 1
년 전에 이미 이혼을 했다는 것과, 자기가 오히려 이
혼을 당했다는 것과, 마누라가 도박에 빠지고 가정을
소홀히 하는 등, 문제가 많은 여자였다는 것까지 강변
하며 이혼사실을 공표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는 두 아이와 전처가 있는 미국으로 훌쩍 날아
갔다. 형님이 말씀해 주신 것이 계기가 돼 홀가분하게
정리가 되어 감사하다는 전화를 받았다는 남편 말을 들
은지 몇일만에 그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형수, 나 재호. 미국갔다 돌아 왔어요. 그런데 형수
정말로 그 소문 누구에게 들으셨소? 내 꼭 알아야 되
겠어.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어느 쪽에서 얘기가 나
갔나 확인해야 되겠거든?

어이가 없고 대책이 안서는 사람이었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아니 두 아이 다 대학생이고 성인
인데 이번 일에 무슨 상처를 그리 크게 받는다고,
저 야단일까? 그리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우화도 못들어 봤나? 없는 사실도 아니고,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다고, 진원지 색출해서 어쩌자는
것이냐? 이 사람 왜 이리 집요하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보시오. 사업하는 사람이 왜그래? 인생에도
중간결산이 있는 법이여. 이런 일은 좋든 싫든
털어 버려야지 언제까지 끼고 있을래? 부부가
살다 보면 이러저러한 갈등으로 갈라 설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면 새출발은 어
찌 하려고? 제발 홀가분하게 털어 버리시오.

산수에서 소숫점 이하는 미련없이 털어 버려야
지 그거 계속 끌고 가다보면 나중에는 계산 복
잡해져 답이 틀려 버리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요. 반야심경에 불구부정이라는 말씀
이 있어. 이 세상에는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다
는 얘기지...자기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
정하고 솔직해 지는 것, 이런 자세를 가져야 마
음 편해지고 길이 보여지는 것이 아닐까? 산전
수전 다 겪은 아줌마 인생관일세...

꽃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