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난생 처음으로 양산에 있는 기도원을 향해 길을 떠났다. 부산여고 시절부터
나와 아주 절친했던 친구 K의 권유로 일주일 간 금식기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내가 서울로 시집을 가서 살다가 부산으로 돌아와 사업을 시작했을 때 가끔 사무실로
나를 찾아오곤 했다. 한 번은 나를 찾아와 허리의 통증을 호소했다. 얼마 후에 다시 찾
아와 양산에 있는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더니 늑막염이 나았다고
했다. 그리고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솔직히 나는 그때 그녀의 얘기들이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부도가 나자 그녀가 갑자기 나타나서 함께 기
도원에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 나서기로 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도가 나자 나이 어린 내가 그 뒷감당을 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나는 직감했다.
나는 일체 돈 거래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채권자들에게 직접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은
행 등 사방에서 빗발치는 전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사는 집을 담보하고 거액의 사업
자금을 댔던 친정 어머니는 완전히 사면초가가 돼버렸다. 나는 넋이 나갔다. 낯선 사람
들이 채권단을 형성하여 몰려들자 나는 아연실색했다. 사람들은 남편이 많은 돈을 가지
고 달아났다고 하며 아우성을 쳤다. 내 이름으로 된 부동산은 죄다 내주고 나는 졸지에
빈 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두 아이는 시댁으로 보내고 막내딸은 친정 어머니에게 맡기
고 나서 나는 탈출을 꾀했다. 그때 친구 K가 찾아온 것이다. 기도원으로 떠나기 전날
나는 송도에 있는 가난한 K의 집에서 묵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일
수록 잘 먹어야 한다면서 손수 남포동 어시장에 가서 생선을 사 가지고 와서 회를 쳐
주고 생선찌개를 끓여주었다. 중풍을 맞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친구의 어머니는 그 불
편한 몸을 이끌고 교회를 찾아가 나를 위해 철야 기도를 했다. 이 뜻밖의 온정에 나는
눈물을 흘렸다. 사업에 성공하여 잘 살 때 나는 내 주위에 어려운 친척이나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내 가정이 편안하고 내 자식만 잘 자라면 그만이었다. 어렵
고 배고픈 이웃을 모르고 오로지 내 행복한 일상에만 흠뻑 빠져 있었다. 자신이 어려움
에 처하여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인간답게 사는 게 어떤 것인지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먼 훗날의 얘기지만 아들의 병역
문제로 곤욕을 치르던 모 대통령 입후보자가 TV 방송에서 하는 말을 듣고 내가 실망하여
그 당의 중앙위원을 사퇴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 입후보자는 사회자
로부터 마지막으로 세 가지 소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첫째 우리 부모님이 건강
하게 잘 지내시는 것이고 둘째로 우리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고 셋째로 내 자식들
이 아무 탈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라고 대답한 걸로 기억한다. 가나안 농군학교 제1기
생으로 연수를 받을 때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김용기 장로의 강의를 듣고 내가 참회의
눈물을 흘렸던 것도 생각해보면 송도 친구집에서 받았던 감동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공공기관에서 시행하는 각종 시민대학에 빠짐없이 참여하여 많은 인사들의 강의를 듣
고 끊임없이 책을 읽어서 삶의 참된 가치를 궁구 했던 것은 모두 그때 그 깨달음을 실
천하기 위해서였다. 송도 K의 집에서 묵고 나서 이튿날 우리는 양산 기도원을 향해 출
발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지가 저려오고 걸음을 가누기 어려울 만큼 온몸이 후들
후들 떨렸다. 친구는 기도원 원장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산꼭대기에 기도실을 얻어 놓았
다. 숲과 나무덤불을 헤치며 30분이 넘게 걸어서 우리는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그날로
친구가 시키는 대로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밤에 모포 한 장을 둘러쓰고 정상에 있는 큰
바위 사이에 앉아 있는 친구를 보았다. 그는 친구인 나를 위해 울면서 기도를 하고 있
었다. 나는 이전에 그 친구에게 작은 것이라도 베푼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찬바람이 부는 가을 산정에 홀로 앉아 밤을 새며 금식기도를 하고 있지 않
은가. 나는 참으로 부끄러웠다. 하나님이 나를 징벌하는 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내 부끄러운 삶을 뒤늦게 회계하고 나는 하나님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아
침이 되자 산 아래로 내려가서 물을 길러왔다. 그 물을 마시며 우리는 금식을 계속해갔
다. 어디선가 산초나무에서 향내가 묻어왔다. 며칠이 지나자 금식기도를 하기가 점점
힘이 들었다. 나는 몸부림치며 하나님에게 내가 갈 길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다. 여우
도 찾아갈 여우 굴이 있고 새들도 돌아갈 둥지가 있는데 내가 돌아가서 몸담을 곳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5일째 되는 날 기력이 극
도로 쇠잔해 버린 나는 친구와 약속한 일주일을 채우지 못하고 결국 산을 내려오고 말
았다. 그 때까지 나에겐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다. 내 눈에는 유독 맛있게 구워놓은 빵
집의 빵들이 어른거렸다. 친구는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자꾸만 내 머리 속을 스치는
소리가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라' 갑자기 구름을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내 얼굴이 환해지면서 입 속에서 저절로 찬송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
다. 친구는 그런 나를 보더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노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어
찌됐건 내 기도로 얻은 성령을 듬뿍 안고 나는 산을 내려왔다.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재충전되어 아주 딴 사람이 돼 버린 나는 부산으로 가는 친구와 양산에서 헤어졌다. 그
녀가 버소 정류소에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주저앉아 버리기는 쉽지만 다시 털고 일어서기는 쉬운 게 아냐. 하지만 난 널 믿어.
잘 가. 다시 일어서면 연락해 줘."
나는 친구와 헤어져서 아무도 반기는 사람이 없는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서
울에서 살고 있다. 그 때 그 친구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는 곳마다 서 있던 교회의 십자
가를 바라보며 내가 그토록 큰 힘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그 친구의 기도의 힘이라고 믿고 있다. 그 때 헤어진 후로 우리는 아직 만나
지 못하고 있다. 어디서 살고 있을지라도 아마 내가 다시 자기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을 것이다. 그리운 친구여! 오늘도 나는 가만히 불러본다.
* 용두산
- 조정애-
친구야
너무 멀리 떠나 살아
집을 떠나지 못한 저 비둘기 앞에
가슴이 시리구나
龍頭를 자랑하던 東光의 빛이
어디쯤 흘러가 머무는지
돌아와 149 계단 오를수록
그리움에 젖는다
우리가 사랑하고
이별하던
꽃이 되고 별이 되고
등대가 된 자리
안개가 산을 부르고
푸른 산이 안개를 얼싸안아
萬頃滄海를 이루도록
미처 깨닫지 못한 生이거늘
용두산
여기, 幼年의 둥지에는
우리를 불러 쌓는
저 비둘기들만이
풀풀 날며
꽃시계를 돌리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