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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급식 당번을 하러 가는 이유는


BY 명랑 2001-05-12

다른 날 보다 아침부터 부산했다.
1년에 2,3번 돌아오는 급식 당번 날이다.
적어도 8시 반까지는 학교에 가야만 했기 때문에 새벽 예배를 드리고 오자 마자 아침 식사 준비를 해 놓고는 세탁기를 돌리고 집안 청소를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감은 머리를 드라이 할 시간이 없어서 대충 빗고는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아내가 일 나간답시고 남편은 아침 운동으로 테니스를 치러 갔다가는 내가 나갈 시간에 맞춰서 들어왔다.
생각해보면 참 착한 사람이다.
좀 늦게 학교에 도착하자 미리 와서 일하고 있던 다른 학부형들이 미소로 나를 반겨준다.
일년에 2-3번 만나지만 우리 아이가 벌써 5학년이다 보니 제법 낯익은 얼굴들이 되고 말았다.
하얀 가운을 입고 모자로 머리카락을 모조리 감추고는 초록색 앞치마를 둘렀다. 그리고는 면장갑 위에 다시 노란색 고무장갑을 꼈다.
두리번거리며 내가 할 일을 찾다가는 도마와 칼을 꺼내서 닭찜에 들어갈 당근을 썰기 시작했다.
당근 썰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감자와 양파와 대파를 각각 다른 모양으로 썰었다.
제자리에 서서 서투른 솜씨로 칼질만 거의 1시간을 해 댔다.
허리가 아파오고 눈이 피로했다.
그러나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식판을 나르고 식판 위에 반찬을 골고루 나눠 놓고 식탁 정리가 끝난 11시 반에 점심을 미리 먹었다.
오늘 내가 할 일은 아이들에게 국을 퍼 주는 일이었다.
2000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두 군데서 배식을 하니까 아마도 내가 국을 퍼 준 학생 수만 해도 1000명은 족히 넘었으리라.
병아리 같다는 표현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1학년 아이들로부터 시작해서 나보다 키가 더 큼직한 6학년 아이들까지 거쳐 가면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아이, "조금만 주세요", "많이 주세요"."미역국은 안 먹어요"요구사항이 가지각색이다.
'내 초등학교 때 모습이 저랬겠구나' ' 참 어렸구나 '생각하면서 그 와중에도 혹시나 우리 아이들이 오지 않았나 싶어 몇 학년 몇 반이냐고 아이들에게 묻기가 일쑤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고개를 쭉 빼고는 우리 아이들을 찾아봤다.
멀리서 딸 아이가 나를 발견 하고는 손을 흔든다.
난 아이들이 없는 틈을 타서 잠깐 딸아이에게 들러서 많이 먹으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끝내 아들 아이의 모습은 찾지도 못했는데 급식이 끝났다고 설거지를 하란다.
설거지에 청소까지 끝나고 난 2시 30분경 딸 아이가 한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서 있다.
학부모회의 때도 와 보지 않은 터라 딸 아이네 교실이나 구경 하자며 들렀는데 담임선생님께서 그때까지 교탁에 앉아 일을 하고 계셨다.
'지현이 엄마'라고 인사를 드리고는 딸 아이의 학교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투명 테이프로 아이들 학습장에 이름 붙이는 걸 도와 드렸다.
일을 끝내고 딸 아이의 손을 잡고, 물론 가방은 내 한 쪽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 시간부터 저녁밥 지을 시간까지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눕히고는 정말 이지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사람들은 내가 급식 당번을 하기 위해 학교에 가겠다고 하면 "차라리 15000원을 내고 말지 뭐 하러 힘들게 가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극구 급식 당번으로 가는 데에는 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아이들이 원해서다.
급식 당번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 우리 아이들은 무척 서운해한다.
엄마가 학교에 온다는 사실이 우리 아이들에게는 큰 기쁨인 것 같다. 며칠 전부터 꼭 와야 한다고 신신 당부한다.
급식이 끝나면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엄마'라고 소개할 때도 종종 있다.
둘째는 식당 일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그 곳에서 일 하다보면 난 식당에서 일 하시는 이웃들이 얼마나 힘든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쩌다가 와서 하는 일도 이렇게 힘든데 날마다 그런 일을 하시는 이웃분들은 참으로 힘드시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셋째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살아가면서 주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난 또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서 그들의 대화나 그들의 생각들을 경험하고 싶다.
넷째는 아이들의 담임선생님을 만나 뵙기 위해서다.
물론 학부모 총회 때 가면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지만 반에서 16명을 임원으로 뽑다보니 나처럼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은 임원이 되기 십상이다.
시간이 자유롭지도 못하고 솔직히 임원이 되는 것이 여러가지로 부담스러워서 난 학부모 총회 때는 아예 참석을 하지 않는 편이다.
대신 급식 당번 때 자연스럽게 식당에서 선생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곤 한다.
다섯째는 15000원이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 돈을 벌기 위해서 날마다 나가서 일 하는 사람도 있는데 몸이 힘들다는 핑계로 돈을 내고 나면 웬지 양심이 편치 못하다.
물론 난 가진 것은 없지만 돈에 구애 받고 사는 편은 아니다.
내게 있는 돈으로 나름대로 짜임새 있게 살아가고 있다.
가능하면 한 달 생활비로 적자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카드도 긁지
않는다. 난 내 이름으로 카드를 일부러 만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 달에 한 번쯤은 영화도 보고 외식도 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산다.
물론 결혼 초부터 이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몇 년동안 난 나를 위해 된장국밥 한 번 사 먹을 여유도 없이 그렇게 아둥바둥 살았었다.
하지만 얼마 전 부터 난 즐기며 사는 법을 터득했다.
한 달에 2-3만원이면 족했다.
그걸로 충분히 나도 나를 위해 투자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엄마로부터 물려 받은 알뜰함 같은 게 몸에 배어 있는 것 같다.
음식이 냉장고에서 썩어 버려지는 일은 거의 없을 뿐더러 E마트에 가면 학용푼이 싸지만 과일은 비싸고 A마트에 가면 과일과 해산물이 싸고 H마트에 가면 돼지고기와 화장지가 싸고...
이렇듯 이미 시장 조사도 끝낸터라 물건을 사러갈 때 어디로 갈까? 갈등 하는 일이 거의 없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어지간히 궁상를 떨고 산다고 말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아낀 돈으로 내일은 오랜만에 친한 동료 부부와 함께
동태 찌개라도 먹으러 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