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동...지금은 안양3동이라는 삭막한 이름으로 불리는 곳..
그당시에는 양지동이 참 촌스럽게 느꺼졌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
정겹고 이쁜 이름이란 생각이 듭니다.
태어나기는 수원에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은 거의 양지동에서
보냈습니다.
1. 나의 별명: 깍두기
나의 언니...언니는 공부도 잘했지만 아이들과 하는 놀이에서도
항상 으뜸이었습니다.
고무줄, 줄넘기, 사방치기등등...동네에서 첫째아님 둘째였으니까요.
반면 저는 정규멤버도 아닌 '깍두기'였습니다.
모두 기억하시겠죠?
깍두기...이편도 저편도 아닌...
전 뛰었다하면 넘어졌기 때문에(그 버릇은 커서도 고쳐지지 않았지만요)
무릎에는 항상 옥두징기(그 당시에는 빨간약을 그렇게 불렀던 것 같아요)
를 바르고 다녔지요.
두 으뜸이 한사람씩 자기편을 뽑을 때 혹시나 하는 맘에(혹 나를 뽑아줄까?)
기대도 해보지만 마지막에 남는 사람은 항상 저였습니다.
언니가 없었음 깍두기는커녕 왕따가 되었을게 분명합니다.
2, 기억에 남는 사물(동물) : 목욕탕집 개
그당시에는 어느곳이나 그랬겠지만 개를 모두 키우고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집 옆의 목욕탕집에서는 개를 참 많이도 키웠지요.
전 어려서부터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개는 오히려 무서워했지요.
목욕탕집은 꽤 컸는데 슈퍼(연쇄점이라고 불리던 곳)에 가기위해선
목욕탕집 담벼락을 돌아야 했습니다.
근데 문제는 담벼락위에 개들이 올라서 있다는 겁니다.
전 그 개들이 무서워서 혼자 심부름을 할 때면 항상 멀리 돌아서
다른 길로 가곤했습니다.
뭐 다행이 물린적은 없지만 무서워서 혼비백산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니까요.
3. 기억에 남는 사건: 병원놀이
저희집 바로 옆집에 친구가 살았는데 오빠가 있었습니다.
우리집옥상이랑 게네집 옥상이 지붕을 타고 오면 넘어올 수
있게 되어있었죠.
친구오빠랑은 잘 놀지 않는편인데 어느날 오빠가 와서 병원놀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빠는 의사, 난 간호원, 친구는 환자였는데..
의사는 항상 환자를 돌보지 않고 누워있으라고 하고선 간호원을
옥상에 있는 골방으로 부르곤 했습니다.
그때 그오빠가 저한테 뽀뽀를 한 것 같습니다.
오빠는 그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고 저희는 7살 정도되었을땐데.
생각해보니 성희롱(?)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왜냐믄 전 오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오빠가 시켜서 당하고만
있었거든요. (그당시에 그찝찝함이 당했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런거 생각하면 우리 딸내미들도 안심할 수가 없단 말이죠.
4. 기억에 남는 집: 이층집과 마당넓은 집
유일한 이층집은 역시 친구집이었습니다.(옆집친구말고)
아버지가 사기인형만드는 회사 사장님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집도 별 어려움없이 살았지만 친구집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넓은 서재겸거실(그곳에서 같이 바이올린 레슨도받았지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늑한 침실....
그중에서도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우리의 주 놀이터였습니다.
하지만 그집은 항상 썰렁함이 느껴졌지요.
가끔 사기인형을 얻어오긴했지만 이층계단말고는 별로 부러울 것이
없는 집이었습니다.
또하나 기억나는 집은 유과장님댁...마당 넓은 집입니다.
저보다는 동생이 더 이쁨을 받아 많이 가게 된 집이지만 마당이
참 넓고 분위기 있었습니다.
우리집도 우물과 그네가 있던 마당이 있었는데 옥상이며 창고를
짓느라 거의 반이상 없어져버렸지요.
그 집도 예외없이 개가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예쁜 꽃들과 울
자매들을 이뻐하던 언니들...
한가롭게 마당의 개미들을 쫓던...
기억의 느낌이 아늑하고 포근한 집이었습니다.
주로 아파트에 사는 요즘 마당은 향수를 불러옵니다.
기억을 더듬자니 나쁜기억, 좋은기억...만감이 교차되지만....
지나고 나면 그것도 다 추억이 되는 군요.
몇 년전에 다시 가본 양지동...많이도 변했습니다.
모두들 어렸을 때 살던 곳을 가면 느끼는 거지만...
넓게만 보이던 골목길, 높게만 느껴지던 담벼락이 이렇게 작은
줄 새삼느끼며...그만큼 내가 컸기 때문이란걸 깨달으며...
하지만 몸만큼 크지 못한 내맘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