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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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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세탁기


BY 은빛여우 2002-07-05

이사를 한지 사나흘이 지났건만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는것 같다.
워낙 정리를 못하는 느슨한 손끝이다
보니 하루종일 종종걸음을 쳐 보지만
내내 그자리가 그자리다.

날씨가 덥다보니 식구 네명 단촐한
구성이지만 그래도 아침마다 나오는
빨랫감은 여느 대가족 못지않다.
하루라도 빨래를 밀리다보면
자칫 빨랫감에 눌려 질식사 하기
직전까지 사태가 악화되므로
무슨일이 있어도 빨래는 그날그날
해 치워야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난리람....

이사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세탁기에 물이 채워지지를 않는 것이다.
서비스 신청을 하기는 했지만
바깥 다른 볼일하고 계속 겹쳐지는 바람에
벌써 사흘째 빨래를 못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저녁에 퇴근해 들어온
신랑을 불렀다.

- 자갸.... 우리 아무래도 신문에 나올꺼 같어
- 왜? 몬일 있어...?
- 몬일은..... 빨래가 넘 많아서 " 온가족 빨랫감에
눌려 압사 ! " 모 그렇게 타이틀 달아서
뉴스에 나올꺼 같어.....
- 그래... 심각하기는 하다,,, 그치~

걸쭉하게 된장찌게 끓인것과 알맞게 쪄진
호박잎으로 맛있게 저녁을 먹고 빨랫감이 가득하게
들어앉은 고무 다라이를 사이에두고 신랑과 마주
앉았다.
비눗칠해서 담가놓은 빨래를 신랑이 비벼서 건네주면
흐르는 물에 내가 헹구어 걸쳐놓고 다시 신랑이 말간
물이 나올때까지 헹구어 낸뒤 비틀어 짠 빨래를
건조대까지 다라이째 옮겨 함께 걸쳐 너는 일을 했다.


부부가 꼭 이유가 있어 행복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함께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가보다.
가끔 신랑이 장난으로 내 코끝에 발라놓는
비누거품도 정겹고 엄마 아빠의 빨래 장난에
무슨 신나는 일이라도 생긴듯 흥분해서 좋아
하는 아이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도 고마운
저녁이다.


비틀어 짜는 일도
빨랫감 비비는 일도 하지 않았건만
그새 손목은 욱신욱신 쑤셔오고
엉거주춤 앉았던 자세로 인해 허리아래 엉치부분이
시큰거려 걸음도 제대로 떼어 놓지를 못한다.

겨우 비비고 잘만큼 자리 만들어 걸레질
마치고 나니 아이들과 신랑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다.


예전에 꿈꾸고 바라던 행복의 기준들이
얼마나 삶을 모르고 그리던 것들이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고장난 세탁기 하나로도 이렇게 커다란 행복을
느낄수 있는것이 바로 삶인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