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불러본다(하나)
모처럼 내리는 봄비의 습기 탓인지 아이들은 고개를 수그리고 잠에 빠져있다.
돌아오는 길 기차안,아이들만이 아니라도 어른들도 여기저기 다들 아침잠에 빠져있고.
노랫말처럼 비내리는 호남선에 실려 흔들리며 가고 있는데 목포행 완행열차가 소리치며
지나간다.
목포행 완행열차,완행열차를 타고 다니며 삶을 연명한 숱한 얼굴들과 그 지난한 삶들이 빗길에서 스쳐 지나가는데 통일호란 글씨도 언뜻 보인다. 유달산과 삼학도와, 대반동 바닷가가 기억에서 살아나고, 홍탁이 살아나고, 거기 젊어서 고뇌도 새파랗었던 한 젊은 시절이 기억도 아련한 영화의 마지막 필름이 돌아간 뒤의 극장안처럼 어두움에 서 있다. 영화가 끝나고 수많은 자막이 이어지는 필름의 끝장면처럼 돌아가는 길에 비가 내리고 있다.
내게도 있었던 그 어느 한 시절이 정말 꿈결만 같다.
아, 그때도 비가 내리고 있었던가. 가는 길, 혹은 오는 길. 사랑이라는 일을 시작하던 길. 사랑이라는 이름의 일을 끝내고 돌아서 오던길. 아니면 누군가를 땅에 묻거나 가슴에 묻고 터벅거리며 돌아오던 길들. 그 길들도 그렇게 비가 내리고 있었던가.행복했던 일들은 다 밝은 날의 햇빛 잔치만 같고 ,슬프고 애잔한 일들은 이렇게 자잘하니 비가 내리고,우산없이 비맞은 처연한 모습으로 다니는 것들의 일색이여야만 이야기가 될 것 같던 세상살이의 일들이라니...
차창으로 자잘한 빗방울이 모여들더니 다닥거리는 빗소리까지 들려온다. 자잘한 빗방울들이 모여들어 어느 결에 큰 물방울이 하나 생기더니 , 차창아래로 미끄럼을 타고 내리고 다시 큰 물방울들이 생기고 내려가고.비닐포대를 들고 완두콩 비닐 하우스로 가시던 키작은 시어머님은 당신 키보다 몇 배나 큰 콩밭에서 콩을 따고 계실려나.
"얘들이 어쩐일이다냐?" 의아해 하시며 세월만큼 주름 패인 얼굴에 피던 의심이라니.
"어쩐일은 무슨 어쩐일이요, 얘들이 학교 안간다길래 왔지요" 해도 반공교육 잘 받은 반공주민이 간첩보듯 하길래 놀러왔다면 또 말이 안맞을 것 같아서 쑥스럽지만 "어버이날이잖아요" 하고 말았다. 그제서야 어르신은 빙그르 동글동글 웃고 마신다.
마루엔 다섯 샀다는 놉이 두 명인데 사람들 앞에마다 완두콩이 두엄처럼 쌓여있다.
내일 아침 일찍 출하시켜야 한다니까 사람들을 늦도록 잡고 비닐하우스에서 작업해 낸 콩들을 선별하고 있는 중이였으니 시계가 밤아홉시라도 저녁전이시란다.
옷도 못갈아 입고 저녁을 지어 먹고 나니 사람들은 돌아가고 손넣어야 할 콩들은 많은데 2학년 아들이 저울위에 손을 얹고 한참을 부비고만 사이 고만 기본 저울추가 500그램에 서서 뒤로 돌아갈 줄 모른다. 도와주지는 못 할망정 훼방이라니, 얘 가서 자라,가서 자거라신다.
그러자, 가서 자거라. 아가 , 봄밤이 얼마나 짧니? 해 긴 봄날에 꽃은 만발하였건만
꽃같았던 한 시절도 한 여름 소낙비 후두둑 거리고 지나간 뒤 산등성이에서 흰구름 목화솜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걸 바라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청춘도 스러져 갔으려니...
아가, 가서 푹 자거라. 애써 너무 힘겨하며 살지 말거라신다.
그렇게 의식으로 스며든 말들이 습기가 되어 ,오랜 관절염으로 차곡차곡 스며드는데 ,잠길 저 쪽에서 기차의 기적소리가 들려온다. 기적소리속에 어머니의 기도소리가 잠시 막히는데
기도도 습기가 되어 아이들 가슴과 뼈속으로 스며드는가.
할머니가 주시는 저 새벽기도를 아이들은 얼마나 먹고 마시는 걸까?
생각해보면 세상사 그닥 바쁠 것도 없는데 매 시간 바쁘다고 아우성을 치고 나도 바쁘다고 아침 기차를 타고 넓은 들판에 가득 핀 보리 편 5월을 기차에 실려 달려오고 있다.
살아계신 동안 건강하시고 잘 지내세요.
그래라. 너도 조심히 가거라. 고맙다.
봄 사월 눈물젖은 보릿고개가 차창으로 스러지고 있었다.
2001.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