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전문 잡지의 편집장으로 있는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방담기사를 기획하고 있는데 참가할 수 있겠
냐는 제의다. 무슨 내용인데? 응, 너처럼 유방 절
제하거나 자궁 절제한 여성들이 겪는 심적갈등에 대
해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런
여성들이 그렇게 할 말이 많다더라. 정말 그렇니?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망서리지 않고 대답을 했다. 글
쎄 나는 잘 견딘 편이었지만, 다른 여자들은 그럴 지
도 모르지. 여성의 상징을 상실한 아픔과 슬픔을 견
딘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을거야.
유방을 절제 할지도 모른다는 집도의의 말에 나는 아
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이러구 저러구 사족을
달 처지가 아니었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가
슴을 살리느냐, 마느냐 보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
에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내 한쪽 가슴은 도륙이 되었다. 없어진 가슴
께를 퇴원 임박해서 근 스무날만에 확인할 수 있었다.
진물이 가시지 않은 상처가 가로로 길게 그어져 있었
다. 흉하다는 생각도,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냥 신기하고 얼떨떨했다. 아, 가슴
을 잘라내면 이렇게 판판하게 되는구나...그랬다.
덜 아문 상처를 남편은 지극정성으로 소독을 해주고
붕대를 감아줬다. 얼마나 정성스럽게 간호를 하던지
남들이 겪는다는 수술 후의 우울증을 나는 전혀 느끼
지 못했다. 그냥 마음 편하고 그리고 든든했다.
실밥을 빼고 상처가 웬만큼 아문 다음, 샤워를 했다.
아주 낯설었다. 담벼락에 물채운 풍선 하나가 축처져
달려있는 것처럼 괴이하고 흉측스러웠다. 참 꼴불견
이구나. 흡사 남의 말 하듯 나는 중얼거렸다.
한시름 놓은 남편이 잠자리에서 나를 감싸안았다. 갑
자기 나는 남편에게 내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
다. 한사코 옷을 잡아 당기는 내게 남편은 슬몃 웃으
며 다독였다. 여보, 나는 가슴이 성할 때의 당신을 만
났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아. 지금은 당신 젓가슴
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내 기억 속의 당신은 늘
온전한 모습이거든...
주눅 들어 품속을 벗어나려는 나를 남편은 힘껏 껴안
았다. 그리고 가만가만 상처를 어루만져줬다. 그때서
야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남편에게 많이 미안했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그렇지만 남편에게 이런 흉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가슴이 없어져도, 자궁이 없어져도 나는 늘 씩씩했다.
그만큼 남편의 사랑이 극진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아
름다움을 몽땅 상실한 불안감을 나는 느끼지 못했다.
불안감을 느끼지 않도록, 남편은 나를 너무 사랑했다.
수술 하고도 나는 여전히 행복했다.
다만, 대중목욕탕을 갈 수가 없었다. 나를 향한 남들
의 시선이 부담스런 까닭이었다. 예민한 사람은 눈치
챌 수 있도록 내 한쪽 가슴은 찌그러져 있었지만 나는
가슴 하나를 만들어 놓은 브레지어를 착용하지 않았다.
무거운 건 질색이었으니까...못말리는 무신경이었다.
나를 향한 헌신적인 남편의 사랑에 보답하려면 나는
내 머리칼을 잘라 짚신을 삼아줘도 시원찮을 것이었다.
그러나 물에 빠진 놈 건져 놓으면 보따리 내놓으라던
가? 죽음의 공포에서 웬만큼 벗어나니 또 그게 아니었
다. 맘이 변했다. 남편에게 섭섭함이 쌓여갔다.
나는 환잔데, 지금도 맘을 못놓는데, 저 남자가 너무
신경을 안써주는 것 아냐? 대개 그런 투정이었다. 짜
증이 늘고 미움이 깊어졌다. 몸과 마음을 바쳐, 밤잠
못자고 죽을둥 살둥 살려 놓으니 적반하장이었다. 가
장 고통받은 사람에게 나는 가장 격렬하고 잔인하게
칼을 겨누는 꼴이었다.
이런 내게 남편도 지쳤는지 같이 미워하기 시작했다.
오가는 말투에 가시가 돋고 눈길이 싸늘했다. 그러나
고집 세고 자존심 센 우리들은 평행선을 달렸다. 나
보다 훨씬 여리고 착한 남편이 먼저 손을 들었다. 당
신, 왜 그래? 지금 당신 모습 예전에 내가 사랑하고
존중하던 그 당신이 아니야.
왜 나를 사정없이 밟는 거야?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
여? 분노에 벌겋게 물든 남편의 눈자위가 물기에 흔들
렸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
고 있는 거야?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내 남편을, 모지
락스럽게 할퀴고 있는 것 아냐? 이 남자가 내게 뭘 잘
못 했다고, 무슨 죽을 죄를 졌다고...
그렇다. 인간은 이렇게 종잡을 수 없고, 앞뒤도 없는
동물인가 보았다.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격렬한 증오와 상처를 줄 수 있는 동물은 오직
인간만이 가진 아이러니였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남편에게 가한 내 횡포를 뒤늦게
참회하며, 나는 내 속에 감춰진 이 이율배반의 본질이
무엇인지 찬찬히 살펴보려 한다. 남편도 남과 비슷한
사람일진데, 나는 그 평범한 남자에게 무한대를 요구
한 것 아닌가? 환자라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배려하고
헌신하고, 사랑할 것을 강요하는...
어렸을 적, 내가 제일 무서워 했던 사람은 상이군인
이었다. 다리 한쪽 없이 목발을 짚고서서 돈 내놓으
라고 소리소리 지르는...볼 때마다 술이 얼근히 취해
뗑깡을 놓는 그들은 세상의 무법자였다. 지금 내 모
습이 그 상이군인과 무엇이 다르랴?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가 가진 모든 조건을
이해하고 수용했다. 아무리 험난한 가시밭길이라도
그와 함께라면 의미가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인생이
었다. 이제 처음처럼, 초심으로 돌아가 남편을 사랑하
고, 이해하고 감사하고 싶다. 내 곁에 변함없이 자리
한 내 남편에게...
꽃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