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만들어지는 중요하고 어쩔 수 없는 일
잘….지냈나요? 늦게 걸려온 전화를 무심하게 받아든 것은 샤워를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머리를 털고, 샴푸의 향이 깔끔하게 코 언
저리를 지나는 것을 맡으며 캔 맥주를 하나 치익! 소리가 나게 따
서 들고 오디오의 볼륨을 조금 높힌 때 였습니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아무말이 없었네요. …나 예
요…알고 있어. 어쩌면 그렇게 담담한 듯 바싹 마른 음성으로 대답
을 하는 것인지… 내 속의 또 다른 내가 대답을 하는 것처럼 나는
스스로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나 무서워요…무슨일이
지? 바로 잠시전 샤워 물줄기 아래에서도 이젠 다른 샴푸를 써야겠
어. 내가 이렇게 한가지 샴푸를 계속해서 쓸 이유가 없어. 그녀는
떠났고 그녀와 나의 관계를 돌이켜 주는 것들은 이제 피해야 할 어
떤 것이 되어 버린 것을 분명하게 해야되… 얼굴에 물을 뿌리면서
잠시 세면기 위의 거울을 보았습니다. 붉은 눈동자 안으로 푸른 그
리움이 출렁입니다. 내 눈동자가 다시는 당신을 다시 한번 발견한
다면 나는 차라리 장님이 되었으면 합니다. 당신을 처음 발견하고
난뒤 떨림이 멈추지 않던 시간들과 당신이 떠난뒤로 유리창을 긁는
듯한 소리가 이명으로 계속하여 들려 오던 물속의 나날들… 그리고
그 참을 수 없는 고독이 다시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합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런일이 있다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잠시 당신을 생각했었고, 그리고 일그러진 기
분으로 Rickie Lee Jones - Pink Flamingo를 걸어 놓았었습니다.
잘 지냈나요? 그런것은 이제 상관 없잖아…내게 그런 이야기 할 이
유가 없어…미안해요. 괜찮아… 그리고 당신은 다시 말이 없었습니
다. 나 역시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그저 이런저런 이야기가 귓전에 웅얼 거릴 뿐이
었습니다. 너무나 듣고 싶어하던 소리를 들은 나의 귀는 당신의 음
성 한조각을 더 들으려고, 전화기를 귓가에 더 힘주어 대라고 내
손에 애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해요. 그런건 상관없어. 몇 번
을 떠나고, 그리고 다시 떠난다고 해도 상관없어… 이젠 돌아오지
마…내가 편안하지 않은 것은 잘 알거야. 이건 아니야…나는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마음속에서 생각하고 그리고 소리가 되어 전화기
저편을 달려가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팽팽한 침묵입니다.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수화기에서 당신의 떨림을 느낍니다.
당신의 침묵이, 그리고 그 큰 두 눈망울에서 주르륵 굴러 내리는
눈물을 듣습니다. 흐느낌은 전기 신호가 되어 통신라인을 타고 이
곳까지 달려와 다시 당신의 슬픔으로 내 가슴에 다가 옵니다.
나 아파요. 병원에 다녀 왔어요…어디야…집이예요. 병원엔 누구랑
다녀왔어? 혼자요…알았어… 나는 그렇게 뜬금없이 알았어 라고 말
하고 전화를 내려 놓습니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콧등을
흐르고 다시 턱을 타고 내려 갑니다. 나는 그저 알았어 라고 하였
을 뿐입니다. 나는 무엇을 알았고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머리속이
텅빈 느낌으로 잠시 서 있었습니다. 단순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당신입니다. 그리고 차가운 뒷모습으로 이
별을 커피 테이블에 던져 버리고 가버린 당신 입니다. 나는 당신의
기억도 당신의 사진 액자도 어쩌지 못하고 멍하게 일주일을 손가락
사이로 모래를 흘리듯 보내 버렸습니다. 수 만번 당신을 생각했고
당신에게 달려 가고 싶었고 그중의 몇 일은, 형 왜 그러세요? 하는
바텐더들의 걱정어린 목소리를 안주로 지구가 빠르게 돌아가는 것
이 분명한 것을 알아 차릴 수 있을 때까지 마셨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별로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봄에 장롱으
로 들어가 박혀버린 장갑 같은 껍데기로 버티어 내고 있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조차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이 떠
난 뒤 카페의 문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고 그 문틈으로 뭔가 나를
지탱하던 모든 것이 빠져나가 버린듯한 어떨떨한 기분이었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당신은 일어서서 나가고 나는 앉아 있었습니다.
이별은 짧고 간단했고 겨울날 숲속의 낙엽 아래를 기어 가는 시냇
물 처럼 차가웠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파요… 혼자예요. 라고 말하였고 나는 알았어 라
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내가 얼마나 많이 당신을 사랑하는지 잘 몰
랐나 봅니다. 다시 당신을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기가 두려워 차
라리 당신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거꾸로 된 마음을 당신
은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신을 적당히 사랑할 수 있었더
라면… 하고 천번은 더 생각 하였습니다. 그렇게 간단히 헤어질 수
있을 만큼만 사랑 했더라면, 그래서 당신이 떠나도 조금만 이라도
지금보다 더 편안하게 숨쉴수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얼마나 많
이 하였는지 그것은 나도 모릅니다. 나로서는 도저히 당신을 적당
히 사랑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간단히 옷가지를 걸쳐 입고 자동차
에 키를 꽂았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는 부서진 두개의 내가 다투고
있었고 그 순간 내게 당신을 만나러 가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고 지금도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하 주차
장을 빠져 나가면서 드물게 파란 밤 하늘을 보았고 가로등이 둥둥
거리며 떠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숨도 못 쉴만큼 보고 싶은 당신
을 만나러 갑니다. 길게 한숨을 내 쉬었고, 그리고 내 마음은 바위
처럼 물밑으로 가라 앉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가지 않았어야 옳았나 봅니다. 그리고 초췌한 당신을 으
스러지게 안지 말아야 했나 봅니다. 당신의 눈물이 내 빰을 흐르게
놓아 두는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분명히 그랬어야… 분명하게…나
는 담배를 툭툭 치며 다시 생각 합니다. 그렇게 많은 후회를 하고
그렇게 많이 상황을 머리속에서 되돌려 보았습니다. 하지만 혹여
당신이 다시 그렇게 물기 가득한 음성으로 잘있었나요? 하고 묻는
다면 나는 다른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떨리는 마음으로 차키
를 꽂고 당신에게 밤길을 달릴 것입니다. 그런건 세상을 살아가면
서 만들어 지는 몇 안되는 중요한, 별루 변하지 않는,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그런일이기 때문입니다.
봄이 깊어 갑니다. 그리움은 화석이 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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