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황금기라는 3~40대, 그 좋은 시절을 146센티 밖에
안되는 노인에게 휘둘려 다 흘려보내고 이제 흰 머리칼에
병든 몸...너무 억울해서 잠도 안온다는 박선생의 얼굴은
분노로 벌겋게 달아 올랐다.
고혈압에 심장병, 그 몸으로 교단에 계속 서기는 너무 버
거워 정년을 못채우고 학교를 그만둔지 일년이 다돼가는
데, 지 엄마만 아는 효자남편은 마누라 심정 알려고도 않
고 엄한 소리만 해쌓니 부아가 치밀만도 했다.
"어머니가 수술까지 하셨는데, 그 어른이 다시 일어서실지
알 수도 없는데, 며느리라 하는 게 내려가 간호 할 생각도
않고...에잇, 나 혼자 내려가마."
찬바람 휙휙 불며 토요일 수업 끝나자마자 어머니 곁으로
뛰어내려간 서방을 보고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어 하소연
이라도 해야 살 것 같아 ?아왔다는 박선생.
무슨 큰 수술을 하셨냐는 물음에 코웃음을 친다.
"지금, 일흔 넷인데 나보다 더 건강하세요. 중병은 무슨
맹장수술한 것 같고 모자가 그 난리잖아요."
없는 집에 홀어머니까지. 친정식구는 물론 친구들까지 반
대한 결혼 우겨서 한 탓에 시어머니와 남편 시집살이 말도
못하고 그저 참고 산 25년.
마음고생이 고스란히 몸으로 나타난 형국이었다. 부부교사
로 맞벌이를 했어도 어머니는 며느리 퇴근할 때까지 그림같
이 앉아 있다 며느리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는 분이셨단다.
곱게 분단장한 얼굴에 홈드레스 떨쳐입고 꼬장꼬장하게 잔
소리를 하다가도 아들만 들어오면 갑자기 어지럼증이 도지는
양반이니 그 꼴 보는 며느리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당당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우리 어머니 버릇은 아들이
키워놓은거예요. 현관문 열자마자 어머니 뭐 좀 잡쉈어? 어
째 어머니 기운이 없어 보이시네, 유난을 떠니 어머니 기가
있는데로 살지 않겠어요?"
어머니 입맛 없으신데 맛있는 것 해드리지 않냐고 볶지를
않나, 팔 다리 주무른다고 밤 늦게까지 어머니 방에서 처
박혀 있질 않나. 계절별로 보약 지어 바치고, 꽃구경 단풍
구경에 해외여행까지...모든 것이 어머니 위주였고.
어머니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평을 하면 금방 서슬이 시퍼래
져 헤어지자고 난리를 치니 짜증도 마음대로 낼 수 없는 처
지였단다. 어떻게 그렇게 살았냐고 물으니 이혼하면 인생 끝
장나는 줄 알고 무조건 참았다는 것이니 요즘도 저런 조선시
대 여인이 있었는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형님 얘기가 내겐 충격이었어요.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말, 마음대로 하다 죽으니 여한이
없다고...갑자기 나는 뭐냐? 하는 생각이 들며 바보처럼 산
내 인생이 미워 눈물이 났어요."
두번째 수술 끝내고 이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순간에
돌아본 내 인생. 그때의 심정을 박선생에게 이야기했던 기억
이 있다.
그때 그랬다. 예후를 낙관할 수 없다는 주치의의 선언에 망
연자실해 있을 때 옆에 있던 후배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언니, 우리가 이런 고통을 왜 받아야 해. 고생만 죽도록 하
고, 무슨 죄를 졌다고. 왜 죽어야 하느냐 말야! 억울해 너무
억울해..."
오열하는 후배를 다독이며 독백처럼 말했었다. 하나도 억울
한 것 없다고. 고생을 한 것도 내가 좋아서 한 것이고, 내가
선택한 인생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다 가는데. 어떤 사람
이 우리처럼 좋은 친구들에 쌓여 살 수가 있겠냐고. 그거 하
나만으로도 우리는 너무 행복한 인생 살다 가는 거라고.
후배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다짐을 하는 심정이었
는데 그리 말하니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한이 없는 인생. 잘
못 조금 하고 가는 인생. 그 정도면 잘 살다 가는 것 아닌가?
"박선생, 146센티에도 180센티에도 당신 인생을 휘둘리고 상처받
지 말아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없는
거에요."
설령 상대가 남편이든 자식이든 또 시부모든 자신이 감당할 만큼
만 헌신하는 것. 내 가정의 평화는 이렇게 지켜야 하지 않을까.
내가 없으면 남도 없는 것을...
꽃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