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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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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책상


BY Suzy 2001-04-23

이른 아침, 부엌 창문을 열고 언제나 처럼 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본다.
손끝에 와 닿는 공기의 촉감, 아~ 완연한 봄이로구나~~~!

언제부터인가 아파트에 살면서부터 습관 되어온 날씨와 기온을 체감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아직 쌀쌀한 아침공기에 무심코 창문을 닫으려던 나는 주차장 한쪽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쓸만해 보이는 책상을 발견했다, 누군가 이사가면서 버리고 간 것일까?

서둘러 아침을 준비했다, 책상을 누가 먼저 가져갈 것 같아서....
학교에 가는 둘째가 나가면서 부엌창문을 향해 두 팔을 크게 들어 둥그렇게 원을 그려 보인다, 책상을 가져와도 된다는 OK 싸인이다, 경비 아저씨의 동의를 얻은 것이다.

얼른 쫓아 나갔더니 경비 아저씨가 고맙게도 거들어 주신다.
좀 작긴 했지만 별로 흠 잡을 데 없는 연한 회색 빛의 컴퓨터 책상이었다.

당장 컴퓨터를 옮겨 놓고 싶었지만 작업이 만만치 않아 남편과 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지금 컴퓨터를 올려놓은 책상은 구식책상이기에 키보드 놓을 자리가 좀 비좁았었다.
주워온 책상에 컴퓨터를 옮긴후, 그 오래 된 책상은 내가 쓸 판이었다, 그들은 내일 옮기자고 했다.

이틀을 기다렸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난 더 이상 밥상에 쪼그리고 앉아서 공부하기 싫단 말이야!"
방 한구석에 놓인 밥상, 아니 내 앉은뱅이 책상을 눈 흘기며 퉁명스레 내 뱉었다.

"어디다 놓으려고 그래? 복잡한데......"남편은 못마땅해하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벌떡 일어나 주워온 책상을 혼자 질질 끌기 시작했다,
끄는 소리도 요란했지만 덜컹거리는 진동을 못 이기고 다리 버팀목이 튕겨져 나왔다.

마지못해 남편이 거든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도 고맙지 않다.

왜 그들은 나에게 책상이 필요하다는 걸 모를까?
왜 나는 밥상이나 부엌의 식탁, 아니면 배를 깔고 엎드려서 글을 써도 괜찮다고 생각할까?

생각할수록 자꾸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도 싱크대나 화장대 말고 내 책상이 필요하단 말이야!" 난 드디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생각해보니 내가 "엄마"가 되면서부터 우리 집에는 내 책상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전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직장이 있었으니 집에서 그리 오래 책상을 쓸 필요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내 책상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도 내가 내 책상을 갖고싶어 한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그랬다, 복잡한 이 집안 어디에 내 책상까지 비집고 들어앉을 수 있을까?

그냥 저냥 밥상을 갖다놓고 폈다 접었다 하기도하고, 아무도 없을 때는 식탁에서 쓰기도 하고, 가끔은 서재에 있는 남편 책상을 쓰기도 하였다.

허지만, 그래도 생각의 편린을 주워 모으기에는 밤이 제격 아니던가?

그러나 한방을 쓰는 남자가 불을 꺼야 잠들 수 있다니 아쉽지만 그냥 사색의 나래를 접을 수 밖에... 언제부터인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의 룸메이트는 그만의 공간인 서재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커다란 한지 한 장을 통째로 펴놓고 붓글씨를 쓸 수 있는 책상이 있는데도 나에게 눈곱만큼도 미안한 기색이 없다.

그 뿐이랴! 앉은뱅이 내 책상에서 흘러나오는 그 작은 스탠드의 불빛도 참아줄 수 없다니!

내가 너무 오래도록 내 자리를 양보하고 살았나보다.
너무 오래도록 나도 모르게 스스로의 가치를 폄하고 살았나보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어느 광고에서 본듯한 문구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싶다!
"책상은 가구가 아닙니다, "엄마"의 인생 필수품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스스로를 일깨우고, 생각의 샘물을 길어 올리며 꿈을 설계하련다.
포장되지 않은 나와 만날 것이며 아직 미완성인 그림에 색칠도 할 것이다.

그 서랍에는 속옷 말고, 미지의 세계를 찾아갈 나침반과 함께 지도를 보관 해야지...

아마도 화장대 앞에서보다 신중할 것이며 싱크대 앞에서보다 행복할 것이다.

이제는 나도 당당히 책상 앞에 앉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줘야겠다.
학생들이나 학자들 또는 프로 작가 같은 사람들만 책상 앞에 앉으란 법 있던가?

내가 그 앞에 앉아서 무엇을 하든 "엄마"도 책상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이 인식하게 해야겠다.

그리하여 작은 공간이나마 침해받지 않는 나만의 성역을 확보해야겠다.
나도 "아내"나 "엄마" 혹은 "주부"이기 이전에 사고하는 인간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