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어둠 마저 숨소리도 내지 않는 아득하고 고요한 밤입니다. 언제 부터인지 알 수 없는 불면증으로 이렇게 오늘밤도 우두커니 어둠과 마주 하고 있습니다. 요즘 가끔 아이와 서점에서 책을 한두권 고르며 이것 저것 뒤적여 보았는데 어린이 문고 앞에서 향수에 젖어 한참을 서 있었답니다. 빨강머리 앤,사랑의 학교,소공녀, 플란더스의 개,엄마 찾아 삼만리..... 어렸을 적에... 항상 끼고 살았던 책들... 비오는 오후에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제목만 훓어 봐도 가슴이 찡 한 것이 옛 생각에 마음만으로도 행복했었습니다. 어릴적 읽었던 책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시절 나를 흥분 시켰던 감동들이 어렴풋 하게나마 되살아 나서 가끔은 아직까지도 저를 미숙한 아이처럼 느껴지게 만들기도 하죠.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 했던 시절이어서 일까요... 그 글속에 주인공은 따로 없었지요. 바로 내가 주인공이 되어 기쁘면 함께 웃고 슬플 땐 같이 목 놓아 울어 보고 안타까운 대목에선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하면서..... 특히.... 빨강머리 앤... 그 책을 좋아 했었어요.. 남들이 놀려 대는 빨강머리를 지녔어도 어디서나 당당하고 자신만만 하던 빨강머리 앤.. 어린 나이에 고아라는 운명 앞에서도 굴 하지 않고 현실을 원망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자기 앞에 놓인 문제들을 용기있게 헤쳐 나가며... 나 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앤을 보면서...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죠.. 내가 결혼 해서 아이를 가졌을 때 즐겨 봤던 TV만화 영화도 바로 빨강머리 앤 이었습니다. 아마...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오후에 방송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시간만 되면 하던 일도 멈추고 TV앞에 오두마니 앉아 그 만화영화 속에 빠져들었죠.. 아마도... 그 일도 태교의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런지.. 돌이켜 생각하니 문뜩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딸아이와 어느 정도 그런 수준의 대화가 통하여 가끔씩 아이와 마주 앉아 순정만화 이야길 할 때면 괜스레 얼굴이 사과 처럼 빨갛게 달아 오른 모습이 너무나 앙증맞고 사랑스러워 살짝 깨물어 주고 싶답니다. 바로...그런 모습에서 예전의 나를 발견 한 듯 해서 새삼 놀라기도 하고...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컸나 하는 맘에 대견하기도 하고... 사람은 누구나 꿈을 먹고 산다고들 하지요. 그래요.... 점점 커가면서 그런 꿈들이 현실과 뒤엉키면서 조금씩 퇴색되어지고 하나 둘 포기하면서... 나중엔 아예 꿈을 접고 살진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런 꿈 마저 없었더라면 아마도 추억거리가 지금 보다는 적었을 거예요. 가끔씩 ... 힘들고 지칠 때... 지나왔던 꿈들을 회상해 보는 것도.. 지루하고 나른한 일상에 하줌의 햇살을 먹고 자라나는 들꽃을 마주 대하는 감동이 되살아 날 겁니다. 요즘은 제 딸아이에게 어린날 내가 느꼈던 작지만 소중했던 감정을 느끼게 해 주려 하나 둘씩 그동안 잊고 살았던 추억들을 들려 줍니다. 아마도... 제 딸도 시간이 흐른 뒤에... 지금의 내 나이 만큼의 세월이 흐르면 내가 무엇 때문에 그리 했는지 알 거라 생각합니다. 꿈이란 비록 이루지 못할지라도 꿈을 꾸는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는걸...